이야기는 액자 밖에서부터 시작된다. 복수를 꿈꾸며 온갖 책들에 파묻혀 복수에 관한 문장을 모으는 사내가 있다. 그에게, 역시 복수만이 삶의 전부인 여인 ‘정(貞)’이 다가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액자 안에서 확장되는 그 흥미로운 이야기에는 피 묻은 칼로써 나라를 제 손에 틀어쥔 극악무도한 재상이 등장한다. 온 사방이 그의 적인지라, 재상은 방이 마흔 칸이나 되는 구불구불한 미궁을 만들어 그 안에서 매일 밤 침소를 바꾸며 생활한다. 어느 밤 솜씨가 뛰어난 한 자객이 재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자객은 제가 죽은 뒤 남을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얼굴 가죽을 벗겨서 씹어 삼키고는 숨을 거둔다. 이 사건을 구심점으로 하여, 재상을 증오하지만 미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철저히 그의 손발이 되어 악을 행해야 했던 재상의 의붓아들, 의붓아들에게 물려받은 복수심을 품고 살아가는 자객의 아이들 ‘명(冥)’과 ‘정(貞)’, 그리고 미궁 안에서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재상의 벙어리 첩 등이 번갈아가며 등장하여 관련된 진술을 겹쳐나간다.
소설 속 인물들은 더 깊은 악(惡)을 향해 가라앉아가는 듯하다. 작품 속에서 악은 읽는 것만으로 몸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된다. 악의 근원, 악을 없앨 수단으로서의 악에 대한 오현종의 사유가 드러나는 이 작품에는 전작 『달고 차가운』(2013)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소설 속에서 악인과 선인은 점점 얼굴의 왼편과 오른편처럼 닮아간다. 자신의 불행을 남에게 퍼뜨려 고독감을 견디고 싶었던 재상과 그 의붓아들의 감춰진 연약함, 그리고 그들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들이 숨기고 있던 잔혹함이 뒤로 갈수록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진실에 근접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