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도시 인천’ 지금은 그 빛깔조차 흐릿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을 일컫던 이 명칭은 개항 이후 계속돼 온 민초들의 저항 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특히 식민지 시대에 빈발했던 근로자들의 노동 쟁의는 저항 의식 배양의 중요한 모태가 되었다. 당시 발행된 신문과 전문가들은 일제하 인천 지역의 노동 쟁의를 ‘항구 도시와 공업 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연일 전개되는 항상적인 현상이었고, 자본가와의 대결뿐 아니라 일제와의 대결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 인천 지역의 근로자들이 끊임없이 노동 쟁의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탄압이라는 요인 이외에도 입지적인 면과 함께 당시 한국인의 경제적인 실태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인천은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지역보다도 일찍이 노동자 계층이 형성됐다. 여기에 수도 서울에 인접해 있다는 입지적인 요인으로 인해 일본 상인들의 진출이 많았고 이에 따른 경제적 과점과 수탈이 커서 시민들의 어려움과 불만이 컸다.
개항 이후 산발적이며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났던 인천 지역의 노동 운동은 1920년 노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가 설립되면서 처음으로 조직화의 중요성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