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이로 말미암아 생긴 후유증을 아직도 치유하고 있지 못할 정도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3년간의 격렬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반도는 초토화되었고,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와 전쟁피해자가 생겨났으며, 이 과정에서 생겨난 걷잡을 수 없는 대립과 증오로 인해 이후 분단체제는 더욱 공고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3년여의 처절한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 국토의 모든 곳이 전장과 다름없었지만, 전쟁의 운명을건 대 혈전이 벌어진 인천과 같은 전장에는 더욱 막대한 병력과 물자가 투입되어 전쟁사에 길이 남을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맥아더 사령부는 개전 초기 북한군의 공세를 오산 ~ 차령산맥 선에서 저지하고, 제1기병사단을 인천 등의 후보지에 상륙시켜 협공하여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블루하트 작전계획을 마련하였지만, 7월 22일경으로 예정된 작전은 미 제24사단이 북한군의 빠른 남하를 저지하지 못함에 따라 7월 10일경 취소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