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제국주의체제를 확립하고 대륙 침략을 위한 첫 단계로 정한론을 내세우며, 한반도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침략에 앞서 1874년 5월 대만침략을 단행하였는데, 이후 청나라는 일본이 장차 한국정벌을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경고한 자문을 조선정부에 보냈다. 또한, 조선정부 내에서도 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년 12월부터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열강과의 수교에 우호적인 의견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내외 여건을 파악한 일제는 포함 무력시위를 통해 조선과의 수교를 압박하기로 하고 1875년 5월초 운요오호 등 군함 2척을 부산에 파견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반도 해안에서 무력시위를 계속하였다. 동남해안에서 무력시위를 계속하던 운요오호는 9월 20일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에 정박하고 보트로 초지진에 접근하던 중 초지진 수비병의 포격을 받자, 초지진에 맹렬한 보복포격을 가하였다. 또한, 오후에는 강화 남단의 수로를 지키는 영종진에 포격을 가하고 육전대를 상륙시켜 공격하였다. 첨사 이민덕 휘하의 영종진 수비병은 화력의 열세를 극복치 못하고 패주하고 영종진이 함락되어 일본군은 진내에서 살육 · 방화 · 약탈을 자행한 뒤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