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이나 주막 같은 영업집과 넉넉한 집안에서는 참나무나 소나무 장작을 땔감으로 사용했는데 장작 시장은 인천여자상업 고등학교 언덕 아래인 모랫말(사동) 해변에 있었다. 외지에서 배에 실어 운반해 오기 때문이었다.
솔가지 단나무는 소바리나 지게로 팔러 다녔다. 차츰 매갈이간과 정미소에서 나오는 섬에 담긴 겨를 온돌방 군불거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겨를 풀무질을 해 가면서 취사용으로 사용하는 알뜰한 집안도 생겨났다. 겨는 일찍이 인천이 개발한 값싸고 독특한 우리의 땔감으로 살림을 보탰다.
『개항 후 인천 풍경』이 아니더라도 1920년대를 거쳐 30년대에 이르는 무렵 인천은 미곡 집산지이자 수출항으로서, 정미업이 호황을 이룰 수밖에 없었는데 정미를 하면서 부산물로 나오는 막대한 양의 겨를 처치하기가 곤란해 인천 바다에 버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이 겨를 인천에서 땔감으로 본격 상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생긴 이야기였다.
1934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에는 “인천 7만 부민의 3분지 2 이상이 유일한 연료로 한다는 등겨값이 폭등을 하여 인천부민의 생활상 일대 위협을 주게 되었다. 는 바 등계 값은 작년 동기에 비해 배 이상의 등귀를 보였다 하며..."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동아일보』는 이 등겨의 값이 폭등한 원인이 만주로의 수출 때문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