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든 싫든 인천이 국내 최대의 공업 도시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 1930년대 후반부터로 일제의 전쟁 수행정책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인천은 천연의 공업 원료나 재료, 그리고 노동력이 풍부하지 못해 전통적으로 공업 발달은 매우 느렸다. 19세기 말 강압에 의해 국제 사회에 문호를 연 이후에도 외세의 수탈물 가공을 위한 공업 시설이 간헐적으로 들어서기는 했지만 규모 면이나 수적인 면에서 지역 경제를 좌우하기에는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이와 같은 공업화의 부진은 일제의 식민 통치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1910년 한국을 병탐한 일제는 한반도를 철저하게 자국을 위한 원료 공급지이자 상품 판매지로 취급해 공업의 발달을 억제했다.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상공업 정책을 집약하여 1910년 12월 조선회사령을 공포한다. 이 법령의 주요 내용은 조선에서 회사 또는 지점을 설치하려면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한반도 내에 근대 공업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억 공업화, 숭 소비지화' 정책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