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서울에 선교의 터를 구축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곧 인천 선교에 착수하여 청국조계 내에 초가집 2채를 구입하여 책방을 열었다. 그리고 이곳에 파송한 노병일로 하여금 책을 팔면서 전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국조계는 조선인 거류지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관계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아펜젤러는 본격적인 인천선교를 위하여 각국조계와 조선인거 류지의 경계지점인 내동 언덕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후 노병일은 2년 동안 인천에 거주하면서 열심히 전도를 하였으나 선교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노병일의 지나친 전도 열정과 인천감리의 선교 탄압이 주원 인이었다. 노병일은 밤에도 노방전도를 하여 주위 사람들이 밤잠을 잘 수 없을 정도 였다고 한다. 더욱이 행인에게 격분한 표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고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유교문화에 물들어 있던 인천 감리는 노병일의 광적인 전도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길 시에 는 퇴거를 명한다는 경고를 내렸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는 민중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여건이었다. 그러나 인천은 여전히 매력적인 선교지였다. 이런 판단에 따라 1891년 6월 내한한 굿셀 감독은 아펜젤러를 인천지역의 선교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아펜젤러는 매주 토요일 말을 타고 인천에 내려와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배재학당 강의를 하기 위하여 월요일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