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린이들은 '성냥’을 《성냥팔이 소녀》 속 소품 혹은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이는 물건쯤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시절 성냥은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기 위해, 밤중에 화장실이라도 갈라 치면 등잔을 밝히기 위해 부엌과 안방 등 집안 곳곳에 성냥을 놓아두어야 했고, 휴대용으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집들이 선물로 성냥이 필수였고, 귀를 후비는 데도 그만 한 게 없었다. 홍보용으로도 제격이었다.
2019년 3월, 헌책방거리가 있는 인천 동구 배다리에 성냥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배다리 성냥마을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성냥을 발명하기 전에 불을 일으키던 도구인 부시와 부싯돌, 부시쌈지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성냥들을 전시해 놓았다. 제조공정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우리나라의 성냥공장들이 어느 지역에 퍼져 있었는지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도 있다. 2층에는 상표를 그리고, 접어서 성냥갑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공간이 있다. 옛 동인천우체국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작은 박물관이지만, 우리나라 성냥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귀한 공간이다. 배다리는 국내 최초의 기업 형태 성냥공장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한반도에 대규모 성냥공장이 들어선 것은 1917년 배다리에서 문을 연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처음이다. 인촌은 '도깨비불'이란 말이다. 부싯돌을 쓰던 시절 성냥으로 단번에 불을 붙이는 걸 보고서는 다들 깜짝 놀라 그렇게 불렀으리라. 자본금은 당시 돈으로 50만 원이었고, 신의주에 성냥의 필수 재료인 나무를 켜는 제재공장도 부속시설로 갖추었다. 성냥 생산능력이 연간 7만 상자였다고 《인천부사》에 나온다. 이 책을 펴낼 당시 경기가 불황이었다고 하는데, 조선인촌주식회사에는 남자 100명, 여자 300명의 직원이 일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성냥의 하루 생산량은 평균 2만6900타. 타는 일본식 단위로 12개 한 묶음이다.
성냥의 마찰면 발화재로 처음에는 황린을 썼는데, 독성이 있고 인화점이 낮아, 쉽게 불이 날 위험이 있기 때문에 1920년 안전한 적린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조선 성냥의 품질이 일본제품에 뒤지지 않게 되었고, 수입해서 쓰는 양도 줄었다. 국내 성냥 수요를 배다리의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 대부분 감당할 정도로 생산량이 많았다고 한다. 《인천부사》는 '작은성냥 상자를 만들어 공장에 보급하는 조선인 가정이 500여 호에 달하는 조선 유일의 성냥공장이자, 인천 공업의 자랑' 이라고 조선인촌주식회사를 소개하고 있다. 성냥갑을 붙이는 가내 수공업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성냥갑 붙이는 이야기는 현덕의 소설 <남생이>에도 등장한다. 1930년대 인천항 일대 풍경을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실감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주인공 노마의 아버지는 인천항에서 소금을 져 나르는 막노동을 하다가, 폐병을 얻어 구들장을 진 신세다. 부인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인데, 할 게 마땅치 않다 보니 인천항 선창가에 나가,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들병장수를 하게 된다. 술병을 들고 다니면서 잔술을 파는 일이다. 온갖 사람들로부터 희롱을 당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참다못한 노마 아버지는 집을 나서려던 부인의 술병을 빼앗아 내던지며, 굶어 죽더라도 그 일을 그만두라고 한다. 그리고는 시작한 일이 성냥갑 붙이는 일이었다.
그 옛날 가정집에서 부업으로 하던 성냥갑 붙이는 일을 이처럼 질감 넘치게 보여주는 소설이 또 있을까. 노마 아버지는 부인이 거들면 두 배는 더 하지 싶지만, 도와달라고 하기가 아니꼬워 엄한 노마만 볶아 일을 시킨다. 노마는 아버지의 시늉을 내 무릎 하나를 올려 턱을 괴고 앉아 작업을 한다. 그렇게 부자간에 붙인 성냥갑은 하루 천 갑 안팎이었다. 계산에 넣었던 양에 턱없이 떨어진다. 벌이가 될 리 없다. 그 시절 성냥갑 붙이는 일은, 기술 없는 무일푼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가능케 했던 마지막 수단이었다.
인천에 조선인촌주식회사가 들어서기 전에, 우리는 성냥을 수입해서 썼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청일전쟁 전후에 우리나라를 여행했던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수입 성냥을 장에서 팔던 모습을 그렸다. 비숍이 청일전쟁 직후 들른 황해도 봉산의 7일장에서 본 여러 수입품 중 일본제 황린 성냥도 있었다. 그 시기에 서울 양화진 쪽에서, 서양인과 일본인이 합작해 작은 성냥공장을 운영한 듯하다. 《인천부사》는 그 공장이 조선 최초의 성냥 제조업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1913년에는 대구에 소규모 성냥공장이 생겼는데, 이내 문을 닫았다고 소개한다. 조선인촌주식회사가 들어서기 1년 전인 1916년에는 성냥 수입액이 80만여 원이었다고 기록했다.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해방 이후, 인천에 새로운 성냥공장을 여러 개 세웠으며, 그 곳에서 다시 성냥을 만들었다. 1947년에는 성냥 제조업 허가제가 도입되었다. 《경기사전》에는 1950년대 후반 인천의 성냥공장이 10개나 되었다며 소재지와 대표자, 종업원 숫자까지 상세히 밝히고 있다. 고려성냥 합동공업사, 대한성냥 공업사, 한양 성냥공장, 목양 성냥공장, 인종 성냥공장, 동양성냥 공업사, 한국 성냥공장, 항도성냥 공업사, 인천 성냥공장, 평안 성냥공장 등이다. 인천이 우리나라 대표 성냥 제조도시였음을 실감나게 한다.
이랬던 성냥이 1970년대 후반 라이터가 등장하면서 설자리를 잃었다. 이제는 성냥을 밀어냈던 라이터마저 보기 드문 시대가 되었다. 배다리의 작은 성냥박물관이 구도심 동구에 활력을 불어넣는 불쏘시개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