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북단 양사면 제적봉에는 평화전망대가 있다. 가까이에서 북녘을 바라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다. 이북 실향민들이 특히 많이 방문한다. 전망대에서 북한 개풍군 대성면 삼달리까지의 거리는 2.3킬로미터이고, 전망대 아래쪽 철산리에서 북쪽 해창포까지는 1.8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바로 코앞에 보이는 거리다. 강화와 개풍, 이쪽과 저쪽 사이를 흐르는 강물을 예부터 조강이라 일컬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교동을 지나 서해에 이르는 물길이다. 조강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 3개의 강물을 하나로 품고 흐른다. 조강이라는 이름은 남북이 분단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이 왕래하지 않는 강이 되다 보니 그 이름을 부를 일이 없었고 자연스레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남북 최단거리, 강화 철산리와 북쪽 해창포, 이곳이 6·25전쟁 직후 남북 간에 은밀한 물물교류가 이루어진 루트였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까맣게 지워졌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으로 남북이 서로 쳐다보지도 않던 그 휴전 직후에 철산리와 해창포를 뱃길로 오가면서, 서로의 물건을 주고받는 교류가 있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강화도 노인들은 그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걸 '이북장사' 라고 했다. 대놓고는 못하고 몰래 은밀하게 하다 보니, 위험하기는 했지만 이문이 많은 장사였다. 이익이 크다 보니 목숨을 내걸고 했다. 이북장사는 두 패거리가 주도했고, 우두머리는 모두 개성 출신이었다. 강화읍내에 간판까지 단 사무실도 있었다.

휴전 직후 남북을 오갈 수 없게 된 엄혹한 현실 속에서 민간인들이 어떻게 서로의 물품을 교환하는 장사를 할 수 있었을까. 군 당국이 뒷배를 봐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 패는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통하던 김창룡 당시 육군 특무부대장이 밀어줬고 다른 패도 라인이 있었다. 북한 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화에서는 페니실린 같은 약품이나 신발류, 옷가지 따위를 싣고 갔다. 북에서는 원산 북어, 명천 다시마, 은수저 등등의 물건이 넘어왔다. 조강을 건너야 하는 일이어서 배에 실을 수 밖에 없었다. 강화 철산리 산이포에서 출발해 개풍의 영정포나 해창포를 드나들었다.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배는 밤에만 움직였다. 일정은 예측할 수 없었다. 1주일도 걸렸고 한달이 넘을 때도 있었다.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북의 군 당국은 이북장사 하는 사람들을 이용해 상대방의 정보를 캐내기도 했다. 물건을 싣는 배에 서로가 간첩을 태워 보내기도 했다. 군 당국이 이북장사의 뒷배를 봐준 것은 첩보전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북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노출된 이중간첩처럼 되어 있었다.

교환해온 물건을 팔면 이윤이 곱절도 넘었다고 한다. 이북장사로 큰돈을 벌어 유명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 개성상회 한창수 회장과 서흥캅셀 창업주 양창길 회장이 그들이라고 속내를 잘 아는 강화의 노인들은 증언한다. 한창수 회장은 강화에서 이북장사로 돈을 번 뒤 서울 을지로에 개성상회를 열었다. 강화에서 장사할 때는 개성상회 간판을 달지 않았고 강화읍 서문 밖 개인 주택을 세 얻어서 살림집 겸 사무실로 썼다고 한다. 양창길 회장은 강화에서 고려약방을 운영했다. 이북장사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품목이 약이었는데, 그는 두 패거리 모두에게 약을 대주면서 큰돈을 벌었다. 이북장사 두 패와 양 회장, 셋 모두 개성 출신이었다.

이북장사는 오래가지는 못했다. 군의 내부갈등 때문이었다. 원용덕 헌병사령관 쪽에서 김창룡 특무부대장을 비위 혐의로 친 적이 있는데 이북장사도 표적이 되었다. 헌병대가 강화 사무실에 들이닥쳐 이북에서 가져온 물건을 싹 쓸어갔다.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당한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 특유의 파벌 견제방식 때문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만주 군맥을 다룬 책 《기시노부스케와 박정희》에서는 김창룡을 만주국 또는 일본 관동군 소속 장교나 헌병으로 위세를 떨친 대표적 인물로 소개한다. 이 책에 따르면,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으로 있으면서 30여 개의 항일조직을 적발한 죄로 해방 후 북한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호송 도중 도망쳐 남한으로 내려와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어, 군 내부 좌익 색출로 이름을 떨쳤다. 《인물로 보는 해방정국의 풍경》을 쓴 신복룡 교수는 김창룡의 별명이 '스네이크김'이었다고 소개한다. 북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월남한 뒤 남한 군부를 비롯한 곳곳에 퍼져 있던 좌익 인사들을 뱀처럼 독하게 잡아냈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을 터다.

이런 김창룡도 결국은 같은 일본군 출신 헌병사령관 원용덕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직후 원용덕의 헌병대와 김창룡의 특무대를 통해 군부를 견제하고 사찰기관 상호 간 경쟁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권력기관의 독점을 방지했다. 군부에 파벌을 키워 서로 견제토록 하는 방식도 구사했는데 여기에 김창룡이 걸려든 거다. 하지만 당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김창룡이 지원했던 이북장사 적발 소식은 철저히 묻히고 말았다. 군 내부의 비위를 밖으로 알리지 않고 비밀에 부친 거였다.

이북장사로 얻어진 이익은 개성상인들에게는 남한에서 일어설 밑천이 되었고, 부패한 군부 세력에게는 뒷돈이 되었다. 지금도 강화에 사는 노인들 중에는 당시 이북장사를 통해 들여온 물건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다. 우리 현대사의 기막힌 사연을 증언하는 귀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