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독배로를 타고 가다 비류대로와 교차하는 옥골사거리에 다다르면 옥련터널이 나온다. 거기에서 우리는 두 개의 '송도'를 만나게 된다. 도로 표지판은 좌회전하면 '송도역'이라고 가리키고, 터널 오른편 언덕에는 '송도고등학교’ 건물이 우뚝하다. 그 반대로, 능허대공원에서 옥련터널 쪽으로 난 길도 마찬가지다. 도로 표지판에는 우회전 하면 '송도역 삼거리'를, 직진하면 '송도고'를 가게 된다고 표기해 놓았다. 두 ‘송도’는 같은 곳일까. 아니다. 태생부터가 전혀 다르다.
송도역, 송도역 삼거리, 송도유원지, 송도신도시는 '송도(松島)', 송도고등학교, 송도중학교는 ‘송도(松都)’다. 섬과 도읍, 한글로는 같은데 한자로는 완전히 다르다. 송도신도시의 송도는 일제가 붙인 왜색 지명이고, 송도고등학교의 송도는 북한 땅 개성을 일컫는다.
송도는 일본어로 마쓰시마라 한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킬 때 이미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라고, 울릉도를 마쓰시마(MATSUE SHIMA)라고 하며 세계에 홍보했다. 영국의 주간 화보집 《런던 뉴스》도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1월 16일 자에 이 같은 지도를 실었다. 하지만 일본은 메이지 시대 초반까지만 해도 울릉도가 아니라 독도를 마쓰시마라 하고, 울릉도는 다케시마라 불렀다. 독도가 다케시마가 된 건 그 뒤의 일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들이 부르는 두 섬의 호칭이 갑자기 뒤바뀐 거다. 이렇게 일본은 예전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헷갈리고 있었다. 자기네 땅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혼동이 가능하다고 본다.
인천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처음 이 이름을 썼다. '송도유원지'의 송도가 같은 의미다. 송도유원지는 1920~30년대 서울 사람을 비롯한 전 국민의 휴양지 역할을 하던 월미도 유원지의 대체재로 만들어졌다. 일본인들의 휴양시설을 목적으로 1937년 개장했다. 해방 이후에는 금단의 땅이 된 월미도 대신 송도유원지에 수도권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1969년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송도유원지 내 해수욕장은 수문개폐 시설을 통해 수량을 조절하는 국내 최대의 인공해수욕장이었다. 모래사장을 만들기 위해 무의도에서 트럭으로 30만 대분의 모래를 실어 날랐다고 한다.
앞에서 얘기했던 도로 표지판에 적힌 수인선의 '송도역’도 같은 시기에 생겼다. 송도유원지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수인선 노선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도 용케 옛날 역사가 보존되고 있다. 송도 역사는 1937년 8월 5일 수인선 개통과 함께 운영을 시작했다. 1973년에는 송도~남인천 구간이 운행을 중단함에 따라 수인선의 종착역이 되었고, 1994년 9월 1일 문을 닫았다. 협궤철로가 철거되고 역의 기능을 상실했으나 부속 숙직실, 화장실, 우물터 등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송도정, 송도역, 송도유원지, 이 셋은 사람으로 치면 1937년생 동갑내기다. 섬도 아닌 곳에 왜 섬 이름을 붙였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연안에 있는, 일본 3대 절경 중 하나라는 미야기현의 군도 마쓰시마에서 따왔다는 설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동원했던 순양함 마쓰시마 호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는 설과 인천시장격인 인천부윤을 지낸 마쓰시마 기요시를 기리기 위해 붙였다는 설도 있다. 어느 게 맞는지 몰라도 이 이름은 송도경제자유구역, 송도신도시, 연수구 송도동, 인천대학교 송도캠퍼스 등으로 가지치기를 계속해 왔다.
또 다른 의미의 송도는 고려의 왕도 개경을 일컫는다. 그 이름에서는 조선에 나라를 넘겨주고 지금까지 600년간을 유랑한 자들의 오래된 디아스포라적 냄새가 풍기는데, 인천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그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송도고등학교와 송도중학교는 1906년 10월 3일 개성 송악산 기슭 산지현에 문을 연 '한영서원'에서 출발한다. 윤치호가 인삼 제조실로 쓰이던, 초가지붕으로 된 뜸집에서 시작한 교육기관이다. 14명의 학생이 이곳에서 배움을 시작했고, 개교 2년이 지났을 때 석조 3층 건물로 신축했다. 1917년 3월 4년제 '송도고등보통학교'로 개명했다. 6·25전쟁중이던 1952년 4월, 인천 중구 송학동에 가교사를 마련해 500여 명의 남녀 피란 학생들을 교육하면서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1년여 뒤 답동으로 이사했다.
송도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송도학원은 한때 재정난에 허덕였지만 1975년 2월, 동양화학 설립자 송암 이회림 회장이 이사진에 합류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송암은 연수구 옥련동에 교사를 신축해 고등학교를 이전하고, 운동장과 체육관, 과학관 등을 지어 규모를 늘려 나갔다. 2020년 1월 8일엔 100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일제 때 이름이 바뀐 뒤부터 따지다 보니 설립연도보다 졸업 횟수가 늦다.
'마지막 개성상인'으로 불리던 기업가 송암은 자신의 호에 '송도의 '송'자를 넣어 개성 사람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실향민이던 그는 북한 미술을 좋아해 국내 최고의 북한 미술 컬렉터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고미술 전반에 조예가 깊어 1992년 10월 인천에 송암미술관을 열었는데, 2005년 6월 미술관과 1만 점 가까운 소장품을 인천광역시에 기증했다.
인천 학교에는 개성에서 피란 나온 곳이 또 있다. 경인교대도 1946년 5월 개성에서 공립 사범학교로 설립된 개성사범학교에서 시작한다. 6·25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2년 4월 1일 인천으로 옮겨왔다. 국립 인천사범학교, 인천교육대학, 경인교육대학교로 이름을 바꾸며 오늘에 이르렀다. 인천 미추홀구청 민원실 앞에는 '여우실 경주김씨 종가 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자리가 바로 인천교대가 있던 곳이다. 여우실은 예전부터 불리어 오던 이 동네 이름이다. 인천의 명문가 김은하 전 국회부의장 집안의 아흔아홉 칸 저택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김은하 부의장 집안의 아흔아홉 칸 저택은 원래 미추홀구청 정문 쪽에 있었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부평을 군수기지로 삼고, 여우실 저택 부지를 일본군 병영으로 지정해 헐어냈다. 김 부의장의 부친은 100미터쯤 떨어진 민원실 쪽에 꼬박 2년이 걸려 아흔아홉 칸을 새로 지었다. 당시 목재 건축의 최고수로 꼽히던 개성 목수들을 고용했다. 왕궁을 보수할 때 개성 목수들을 썼다고 하는데, 고려를 뒤엎고 선 조선일지라도 목수만큼은 고려 때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온 개성 출신을 우대했던 모양이다. 일제는 한국 사람이 큰 집을 갖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난데없이 지금 미추홀구청 정문에서 용현시장과 독쟁이 언덕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개설했다.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아흔아홉 칸 중 서른네칸이 또 다시 헐려나갔다.
이 집 일부는 6·25전쟁 직후 인천교대에 자리를 내주었고, 미추홀구청이 민원실을 신축할 때 나머지 집터마저 넘겨주었다. 김은하 부의장은 이 집에서 제6대부터 11대까지 내리 6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기록은 아직도 인천에서 깨지지 않고 있다.
송도는 여전히 일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아픈 현실을 깨닫게 하고, 송도는 천년 도읍 개성의 젊은 혼을 키워내고 있 뿌듯함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