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명승지 제1번은 어디일까. 선뜻 대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 승지가 경치 좋은 곳을 말하고 그 앞에 명자가 붙었으니, 명승지의 기본 조건은 경관이 뛰어난 동시에 사람들에게 이름이 나 있어야 한다. 인천에서 제일 경치 좋고 이름난 곳? 어떤 이는 송도신도시를 내세울 것이고, 어떤 이는 강화도나 백령도, 대청도를 말하기도 할 것이다. 인천대교나 월미도, 자유공원, 문학산 등을 거론하는 이도 있을 터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명승지를 대번에 떠올리기 어려운 곳이 인천이다.
1973년에 발간된 《인천시사》 하권에서 소개한 인천의 명승지 첫 번째는 자유공원이었다. 그 시절은 그랬다. 자유공원에 서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 하나만으로도 으뜸으로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가 수봉공원이었고 지금은 알 수도 없는 도원공원, 목공원, 동산공원이 그 뒤를 이었다. 일제강점기 수도권 최대 유원지이자 환락의 공간이었던 월미도는 여섯 번째로 밀렸다.
자유공원은 인천이 아주 오래 전부터 국제도시였음을 보여준다. 한반도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조성되었는데, 1897년 만들어진 서울 탑골공원(파고다공원)보다 9년이나 빨랐다. 1888년 11월 9일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일본, 중국 등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던 여러 국가의 외교관들이 공동 서명하여 조성되었다. 측량과 설계는 러시아 토목기사 사바틴이 맡았다. 사바틴은 우리나라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인물로, 탑골공원도 설계했다. 자유공원 설계 경험이 탑골공원에 반영되었을 게 분명하다.
이름 변천사도 만만치 않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 불렀다. 이름처럼 관리권 또한 공원조성에 관계한 여러 나라에 있었다. 일제는 1914년 외국인 거류지 제도를 폐지하고 공원 관리권을 지금의 인천시 격인 인천부에 이관한 뒤 이름을 서공원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인천신사를 세우고 그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했는데 신사 주변을 동공원, 원래 있던 각국공원을 서공원이라 한 것이다.
해방된 1945년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가 1957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세우면서 자유공원으로 바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맥아더 장군 동상 옆에는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장면을 조각한 부조 작품을 걸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불편한 진실이다.
인천에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조성한 공원이 들어선 이유는 이곳이 중요한 개항장이었기 때문이다. 1883년 개항된 지 5년이 지난 1888년, 우리 정부는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일본, 중국 등 국내 주재 외국 외교관들과 협약을 맺었다. '인천항구각국조계장정’ 이다. 조계지는 각 나라 사람들이 자유롭게 상업활동 등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뜻이다. 각국 영사관도 잇따라 들어섰다. 조계지로 땅을 내주었다는 점은 불평등조약의 대표적 사례이기는 하지만 국제도시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뒤 100년, 인천에는 또 하나의 국제도시가 들어섰다. 송도경제자유구역이다. GCF(녹색기후기금) 등 여러 국제기구 사무실이 입주한 송도는 미국 게일사가 개발했다. 130년 전 개항시기에 그랬듯이, 오늘날도 우리는 국제도시 하나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각국공원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이곳에서 처음 열렸다는 점이다. 1919년 4월 2일, 검사직을 집어 던지고 독립운동을 벌이던 홍진과, 기독교 전도사 이규갑, 천도교 지도자 안상덕 등이 비밀리에 각국공원으로 찾아들었다. 지역과 종교 대표 20여 명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엄지손가락에 흰 종이나 헝겊을 감고 나타났다. 이날 모임에서는 임시정부의 약법과 정부조직안을 확정하고, 이 내용을 서울 국민대회에서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일제의 감시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에 이들은 왜 인천 각국공원에서 모임을 가졌던 것일까. 자유공원 정상에 올라 인천항을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각국공원 조성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서양식 건물이 세워졌다. 인천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인 세창양행 사택이 가장 먼저였다. 1884년 준공된 단층 벽돌집으로, 화학약품, 염료, 화약, 면도칼, 바늘 등 유럽산 제품을 수입 판매하던 독일계 회사 세창양행 직원들의 숙소였다. 이 건물은 해방 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쓰였지만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격을 받고 소실되었다.
공원이 들어선 응봉산 정상에 우뚝하게 자리잡아 인천의 랜드마크로 불리던 존스턴 별장도 있었다. 1905년 준공된 이 별장은 석조 4층 규모로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 상하이에서 항만 건설업을 하던 영국인 제임스 존스턴의 여름 별장이었다. 설계는 독일인이 하고 시공은 중국 업자가 했다. 지붕을 장식한 붉은 기와는 중국 칭다오에서, 조명을 비롯한 전기 관련 장치는 세창양행을 통해 독일에서 수입했다. 가구는 모두 영국에서 들여왔으며 내부 목조 장식을 위해 상하이에서 12명의 조각가들이 출장을 오기도 했다. 국제도시에 딱 맞는 건축물이었던 셈이다.
존스턴 별장은 몇 번 주인이 바뀐 끝에 1936년 인천부청에서 인수해 서공원회관이라 했다가 곧바로 인천각으로 고쳤다. 고급 여관 겸 요정이었다. 이곳에서 연회를 열었던 인물 중 인천의 1호 의학박사 신태범이 있다. 신태범 박사는 저서 《인천 한 세기》에서 ‘1943년 봄에 학위를 받은 축하회를 인천각에서 가졌는데 장광순 선배가 진행을 맡고 내빈도 많아 성황을 이루었었다. 그때 박사가 된 기쁨도 컸었으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존스턴 별장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기쁨이 나의 가슴을 한층 벅차게 했었다’고 술회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나와 거기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조차 인천각 무대에 서보는 게 꿈이었다니, 일반 서민들의 눈에는 그 인천각이 어떻게 비쳤을까.
해방 후에는 미군들이 고위장교 숙소로 사용했으나 1950년 인천상륙작전 당시 함포사격에 파괴되었다. 최성연 선생은 <인천각>이라는 작품을 지어 이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을 아쉬워했다. '오정포산'으로 시작하는 작품에는 여적도 남겼다. 오정포산의 본래 이름은 응봉산인데, 일제시기 이곳에 있던 인천측후소에서 낮 12시에 시각을 알리는 소형 산포를 공포로 발사해 오정포라 불렀다고 선생은 설명하고 있다. 인천각과 관련해서는 건축비로 30만 달러가 들어갔다고 밝혔다. 30만 달러면 지금으로 따져도 3억5000만 원이 넘는데,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상하이조선소 사장이던 존스턴은 인천각이 몹시 흡족했던지 인천각과 똑같은 쌍둥이 저택을 상하이에도 지었다고 한다. 상하이에 이 건물이 남아 있다면, 전쟁으로 파괴되기까지 4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어떤 건물보다도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가진 인천각의 복원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