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전철 동인천역에서 내려 남광장 쪽으로 나오면 커다란 삼거리와 마주하게 된다. 광장 정면으로 쭉 뻗은 대로 왼편이 용동이다. 1970~80년대만 해도 인천의 명동으로 불릴 만큼 화려했는데 지금은 대낮에도 오가는 사람이 드문 쇠락한 옛 동네가 되었다.

여기에 인천시 민속자료 제2호 '용동 큰우물'이 있다. 기와를 얹은 보호각과 그럴 듯한 글씨의 현판이 제법 운치를 돋운다. 현판은 우물 보호각을 개축해 다시 세운 1967년에 동정 박세림이 썼다. 보통 때는 우물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게 흠이다. 누군가 쓰레기라도 버릴 것을 걱정해서인지 뚜껑으로 박아 놓았다. 우물 바로 앞에서 식당 '금촌집'을 운영하는 문성분 할머니가 우물 관리인 격으로 있다. 곱창전골이 일품인 이 식당도 1972년부터 여태껏 하고 있다니 용동 큰우물과 함께 이 동네의 명물로 손색이 없다.

용동큰우물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우물 안내판에 적힌 내용을 보자.

‘1883년 인천 개항 무렵에 현재와 같은 우물로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는 자연 연못으로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하여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인천 시민들의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광복 후, 수도 사정이 좋지 않을 때에도 인천 시민들의 생활용수로 활용되었다. 우물의 크기는 지름 2.15미터, 깊이 10미터고 우물 내부는 자연석과 가공된 돌을 둥글게 쌓아 만들었으며 지상에 노출된 윗부분은 원형의 콘크리트 관으로 마감하였다. 우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1967년 기와지붕의 육각형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현판은 인천 출신의 서예가 동정 박세림이 썼다.’

우물은 군부대에서도 길어갈 만큼 수량이 풍부했다고 한다. 그 옛날부터 용동은 우물만 유명했던 게 아니다. 권번, 속칭 기생집도 알아줬다. '용동권번'이란 이름이 생겨날 정도였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1936년의 '인천상공인명록' 등을 근거로 펴낸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 :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에 따르면, 용리 (지금의 용동)에서 주류나 음식물 판매업을 하고 세금을 내던 음식점은 8곳이었다. 이들 술집에서는 모두 이 용동 큰우물의 물을 썼을 게 틀림없다.

권번은 기생들의 활동 무대이면서 동시에 교육기관이었다. 그 명칭도 수시로 바뀌었다. 용동권번의 경우 1900년대에는 용동기가로 불렸고, 1910년대에는 용동기생조합소, 1920년대에는 용동권번, 1930년대에는 인화권번, 1930년대 말에는 인천권번으로 그 명칭이 변했다. 여러 기록을 보자면, 용동권번의 기생들은 평양이나 서울 기생보다는 낮게 평가되었지만 개성에 비해서는 나았다고 한다. 특히 잡가 실력만은 어느 지역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아마도 평양이나 서울에 비해 인천 손님들의 출신지역이 다양했기 때문에 그 취향에 맞추기 위해 기생들이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큰우물 바로 옆이 한국 미학의 개척자 우현 고유섭 선생의 생가터다. 지금의 동인천 길병원 자리다. 우현 선생이 이곳에서 출생했음을 알리는 표석을 세우고, 일대 큰길과

골목길을 ‘우현로'로 명명해 선생을 기리고 있다.

어릴 적 한학을 공부한 우현은 1914년 인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18년 졸업했다. 그 이듬해인 1919년에는 용동 일대에서 꼬마들과 함께 3·1 만세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당시 우현이 그려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동네를 뛰어다녔다는 구체적인 증언도 있다. 흑인시인으로 불리는 배인철의 형인 배인복은 당시 여덟 살 이었다. 용동에 살던 그는 우현이 준 태극기를 흔들며 동네를 두 바퀴째 돌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다. 어린 아이들은 훈방으로 풀려났지만 열네 살이던 우현은 유치장에 갇혔다가 사흘 만에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풀려나왔다. 우현의 부인 이점옥 여사도 비슷한 증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우현의 용동 만세운동이 틀린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그런데 인천지역 3·1만세운동사에서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우현은 1920년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인천에서 통학하면서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에서 문예부 활동을 했다. 1925년 경성제국대학 문과에 입학, 미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1930년 경성제대를 졸업했고,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취임했다. 1944년 간 경화로 사망했다. 개성 청교면 수철동에 묘소가 있다.

용동 큰우물과 용동권번, 고려청자의 우현, 그리고 길병원, 물맛은 술맛과 직결된다. 고려청자와 술병도 멀리 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술은 알코올이며, 알코올은 병원의 상징으로 이어진다. 모두 흥한 이 넷을 이렇게 묶으면 억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