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앞바다의 광활한 섬 지역을 관할하는 옹진군청은 섬이 아닌 육지에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옹진군을 이루는 섬들이 백령도나 연평도, 덕적도, 영흥도, 장봉도 등지로 넓게 퍼져 있다 보니 어느 한 곳을 군청 소재지로 삼지 못하고 아예 제3지대라 할 수 있는 뭍에다 세운 게 아닌가 싶다. 옹진군청이 자신의 행정구역이 아닌 다른 동네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도 색다른데, 그 주변에는 다소 어리둥절한 지명이 또 있다. 옹진군청 바로 옆 사거리를 '낙섬사거리'라 칭한다. 경인고속도로, 제2경인고속도로, 인천~김포고속도로 등 주요 도로와 연결되는 곳이어서 교통량이 많기로 유명하다.
섬은 볼 수조차 없는데 낙섬사거리라니. 지명은 늘 그 땅의 내력을 알려준다. 이 지역은 몇 십 년 전에 매립된 곳이다. 그 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지대였다. 거기, 낙섬이 있었다. 낙섬은 납섬에서 유래했는데 납섬이라는 말의 유래는 다양하다.
낙섬사거리 근처에는 원도라는 섬이 있었다. 섬이 원숭이 모양처럼 생겨 그렇게 불렀다. 원도에서는 신라 때부터 원도사라는 사당에서 해신제를 지냈다. 원숭이를 일컫는 잔나비의 '나비'가 납섬이라고 할 때의 '납'으로 변했다는 설과 제사를 드리다는 뜻에서 납섬으로 불렸다는 설 중 어느 것이 맞는지 몰라도 지금의 낙섬사거리는 원도에서 유래한 지명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낙섬사거리 육교 부근에는 '원도사 터'를 알리는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낙섬사거리에서는 병자호란의 살벌했던 전투 상황도 이야기할 수 있다. 병자호란이라고하면, 보통 남한산성이나 강화도를 떠올리지 용현동 낙섬사거리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용현동에는 2018년 개원한 인천보훈병원이 있다. 그 뒤편 언덕마을 깊은 골목에 '이윤생 • 강씨 정려'가 단출히 세워져 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호, 그 안내판에 설명이 나와 있다.
‘이윤생은 인천에서 대대로 살아온 부평이씨의 후손으로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인 원도로 들어가 적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으나 의병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 강씨는 바다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에 나라에서 철종 12년, 정려를 내리고, 이윤생을 좌승지, 부인 강씨를 숙부인으로 추증하였다.’
미추홀구 용현동이 어째서 서울의 동쪽 남한산성과 한강 하구 강화도의 길목이란 것일까.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은 1636년 12월이고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잇따라 함락된 것은 1637년 1월이다. 원도의 전투도 1월에 있었다. 많은 이들이 배를 타고 강화도에 가려면 강화와 김포 사이의 염하를 건널 것으로 생각하지만 겨울에는 쉽사리 배를 띄울 수 없었다. 염하가 얼기도 했으며, 한강에서 떠내려 오는 유빙에 배가 침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는 바다가 얼지 않는 강화도 남쪽 바다를 택해야 했다. 예전에는 원도나 월미도 등지에 강화도로 가는 배터가 있었다. 조선시대 이야기만이 아니다. 1960년대 말 강화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강화도와 인천을 잇는 뱃길은 동구 화수부두 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강화도로 통하는 뱃길이 있던 곳, 원도는 병자호란의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다. 그 요충지에 의병들이 들어가 청군의 맹렬한 정규군과 붙었으니 승패는 이미 정해진 바였다.
의병의 날(6월 1일)을 하루 앞둔 2019년 5월 31일 오후 '이윤샘 • 강씨 정려'를 찾았다. 인천에서 25년 가까이 살면서 처음이었다. 골목은 정말 높고도 깊었다. 동네 할아버지 두 분한테 안내를 받고서야 겨우 찾았다. 의병의 날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로 삼았다고 한다. 인천에서는 6월 1일 어름에 낙섬사거리나 '이윤생 • 강씨 정려'를 찾아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이윤생과 함께 청군들과 싸우기 위해 의병이란 이름을 내걸고 일어났던 인천 지역 수많은 민초들의 죽음도 함께 떠올려야 한다. 이윤생은 양반이었기에 역사에 기록되어 남았지만 평민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이윤생의 부인은 금천 강씨였는데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금천은 지금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일대의 관악산 주변이다. 나라에서는 이윤생과 그 부인을 본보기 삼아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정려를 내렸다. 그러나 그 후 5년 만에 병인양요가, 10년 뒤에 신미양요가 일어나는 등 나라는 자꾸만 기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