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수공장에 끌려와 일해야 했던 징용노동자들을 기리는 동상이 2017년 8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인천 부평에 세워졌다. 부평의 인천 육군 조병창은 일제가 세운 한반도 최대 군수공장이었다. 부평공원에 세워진 동상은 조병창에서 육체적 정신적 수탈을 당한 노동자들을 위한 조시이자 조곡이기도 하다. 부평공원은 일제에 이어 주한미군에 의해서도 군사기지로 징발당해온 부평의 기막힌 역사가 서려 있다.

미군은 해방 직후 그러니까 1945년 9월 8일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인천에 진주했고, 그 질긴 인연을 아직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인천항에 입항한 미군이 우선 신경을 쓴 곳이 부평이었다. 일본군의 핵심 군수기지가 부평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1930년대 후일으키면서 군수기지를 부평에 건설했다. 병장기를 만드는 군 시설이라고 하여 조병창 이라고 불렀다. 이 군사시설은 고스란히 미군기지로 전환되었다. 해방과 함께 등장한 미군은 1949년 한반도 철수 이후 1950년 9·15 인천상륙작전 때까지 1년여를 제외하고는 부평을 떠난 적이 없다.

일제는 왜 농경지인 부평에 군수공장을 건설했을까. 방대한 중국 땅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 수행에 부평이 최적지로 평가되었다. 넓은 평야지대인 데다가 부평의 서쪽과 북쪽을 철마산이 둘러싸고 있어 중국 방향에서의 공군 공격을 방어하기에 용이하다는 판단이었다. '조선시가지계획령' 의 후속 작업으로 '경인시가지계획' 이 추진되었고, 일제는 1938년부터 부평 일대에 군수 산업시설을 본격적으로 유치했다. 조병창이 세워지기 전에 먼저 군수 기업 미쓰비시 공장이 들어섰다.

부평 조병창에서는 소총, 탄약, 소구경화포탄약, 총검, 수류탄, 경차량 등을 제작했다. 조병창 주변으로는 금속 기계, 자동차, 화학, 식품, 요업 등 크고 작은 공장들이 잇따라 생겨나, 이 일대는 거대한 군수산업 도시로 뒤바뀌었다. 인천 육군 조병창은 평양에 있던 평양병기제 조소도 관할하는 일제의 해외 군수 거점이었다.

조병창 운영 초창기부터 일했던 노동자의 증언이 인천작가회의가 펴내는 문학계간지 《작가들》 2019년 봄 호에 실렸다. 주인공은 1925 년생 김우식 할아버지. 이상의 인천대 초빙교수가 2017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충남 청양의 자택에서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그 내용을 정리했다.

김우식 할아버지는 17살 때인 1941년 봄부터 1944년 12월 탈출 시까지 제2공장에서 방아쇠를 만드는 반에 소속되어 연마작업을 담당했다. 3개월간 기능자양성소에서 훈련을 받고 나오면 1~3공장의 부서로 배치되었고, 다른 부서로 옮기지는 못했다. 여러 공정을 다 배우면 조선인이 총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같은 일만 시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장 규모는 커졌지만, 헌병들이 곳곳에서 지키고 있어 직원들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고, 급식도 제대로 안되어 늘 배가 고팠다. 돈을 벌고 싶어 들어갔지만 착취만 당했고, 사직서도 받지 않았다. 3년 6개월을 버틴 뒤 도망쳤고, 우여곡절 끝에 해방을 맞았다. 75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했다.

그 많던 일제의 군수산업 시설 중 일부는 해방 이후 잠시나마 노동자들이 운영했다. 작가 이규원이 1948년 발표한 소설 《해방공장》이 바로 그 이야기를 전해준다. 조병창을 중심으로 하는 군수산업 시설에서 온갖 착취를 당하며 일제의 전쟁물자를 생산해내던 노동자들이 해방을 맞이하고 스스로 공장을 운영해나간 이야기를 생생하게 썼다.

후속편이 발견되지 않아 《해방공장》이 미완이 된 것처럼 조병창은 노동자들의 차지가 아니라 미군이 접수해 버렸다. 해방은 되었지만 완전한 해방은 아니었던 것이다.

미군은 조병창 일대에 눌러앉았다. 캠프 마켓, 캠프 하이예스, 캠프 그란트, 캠프 타일러, 캠프 아담스, 캠프 해리슨, 캠프 테일러 등 7개 부대를 주둔시켰다. 제24지원사령부도 배치했다. 영어로 애스컴이라고 불렀다.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도시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아예 '애스컴 시티'로 지칭하기도 했다. 그 애스컴이 1973년 공식 해체되어 많은 부지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는데 캠프 마켓은 아직도 남아 있다.

70년이 넘었지만 인천에서 미군이 저지른 일들은 아직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게 많다. 그중에서도 부평에서 벌어진 반공포로 탈출과 학살 사건이 주목할 만하다. 1953년 6월 18일 전국에서 반공 포로들이 석방된 날 부평의 반공 포로들만 석방되지 못했다. 포로들은 다음날 탈출을 감행했지만, 감시 병력이 한국군 헌병에서 미군 헌병으로 바뀐 뒤였다. 철조망을 넘다 미군의 기관총에 맞아 죽거나 다친 포로가 500명이 넘었다. 탈출에 성공한 포로는 1500여 명 수용자 중 300여 명이었다. 당시 반공 포로로 있던 박종은의 수기 《PW-포로수용소생활 1200일 실화》에 전하는 내용이다.

부평의 반공 포로들은 미군기지 건설작업에 동원되었는데,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지 못하고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당시 신문들은 탈출사건 이후 850명이 부평에서 논산으로 이송됐다고 보도했다. 사라진 350명에 대한 진상 규명 없이 묻혀버린 사건이라 마음이 착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