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시즌, 인천 SK행복드림구장 홈경기를 보러 가는 인천 팬이라면 누구나 따라 불러야 하는 노래가 있다. '연안부두’다. 8회 초가 끝난 뒤 1절만 부르고 스피커는 멈추게 되는데 응원석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2절까지 합창을 이어가면서 홈팀 사랑의 열기를 공유하고 드높인다.

‘어쩌다 한 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말 해다오 말 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작사가 조운파의 노랫말이다. 김트리오의 노래 가락을 따지지 않고 가사만 보더라도 선수들의 흥을 일깨우고 에너지를 충만하게 해야 할 응원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슬픈 곡조다. '어쩌다 한 번 오고' '꿈을 두고 떠나고’ '갈매기도 울고'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정든 사람은 떠나가고’ ‘불빛은 외롭고' '마음마저 홀로 서 있고….

게임이 종반에 접어든 그 절체절명의 시기, '승리'를 말하는 대목은 어느 한 구석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연안부두는 그렇게 만나는 희망보다는 떠나는 아픔과 그리움이 짙게 밴 곳이다. 노래 〈연안부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인천 팀의 응원가로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부산의 <부산갈매기>나 광주의 <남행열차>처럼 <연안부두>는 야구장에서만큼은 인천을 대표하는 노래로 굳어져 있다.

연안부두는 1970년대 신항으로 조성되었다. 1974년 5월 10일 인천항에 제2선거가 완공됨으로써 인천항 내항은 완전히 폐쇄형 항만이 되었다. 대형 선박들만이 도크를 통해 입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00톤 미만의 소형 선박들은 다른 곳에 정박 시설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제2신항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안부두가 건설되었다.

소월미도 남쪽 공유수면 7만6000제곱미터를 매립했다. 이를 위해 여러 정부기관이 참여했다. 우선 건설부가 남북방파제 650미터와 호안 590 미터, 잔교 5기, 임항도로 530미터를 축조했다. 인천시는 진입도로와 물양장 150미터 등을 건설했다. 수협에서도 물양장과 수산센터 1개동, 어물 하역 크레인 3기를 시설했다. 교통부에서는 여객터미널을 세웠다. 군용 선박도 연안부두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국방부에서도 잔교 시설을 했다. 이렇게 해서 연안부두에는 연안객선부두, 수산센터, 소형어항, 관용부두 등이 한데 모이게 되었다.

연안부두는 제2선거 준공 1년 전인 1973년 5월 1일 완공되었고, 연안여객터미널은 민자를 유치해 건설되었다. 연안부두 어시장은 소래포구 어시장과 함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수도권 최대 규모 수산시장으로 우뚝 섰다. 이 연안부두에는 인천의 어시장 역사가 녹아 있다. 내항이 있던 인천역 부근 하인천 어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생선장수들이, 연안부두로 어시장이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 왔다. 1981년 기준 연안부두 어시장 점포 수는 568개였다. 연안부두에는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규모 아파트도 건설되었다. 하인천에 비하면 연안부두는 그야말로 최신식 시설이다.

하인천 어시장이 성할 때에는 인천역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들도 많았다. 인천에서 커다란 고무 대야에 생선을 담은 뒤 냄새 나지 않게 비닐로 몇 겹이나 씌워 머리에 이고서는 서울 마포, 용산, 한남동 등지의 주택가를 돌아다니면서 팔았다.

좁디좁은 하인천 어시장에서는 사람이 붐비다 보니 소매치기도 많았고, 어린아이를 놓고 가는 아동 유기 사건도 잦았다. 자신의 어물전 앞에 버려진 아이를 어쩌지 못하고 데려다 친자식 삼아 키운 생선장수들도 있었다. 어물전에서는 이렇게 버려짐의 아픔과 새로운 만남의 희망이 버무려지기도 했다. 어시장이 연안부두로 옮기고 나서는 그런 일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어시장이 있으면 꼭 따라다녀야 하는 장사가 있다. 생선을 부패하지 않게 하는 얼음 장수들이다. 연안부두에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얼음 장사의 역사를 지닌 가게가 있다. 어시장 바로 옆에 있는 '천일얼음'. 가게를 처음 낸 것은 양계환 할아버지였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지금의 공장은 그의 아들이 운영한다. 양계환 할아버지는 1960년대 하인천 어시장이 있을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얼음을 팔았다. 큰 덩어리 얼음을 톱으로 잘라 팔던 시절이다. '천일얼음'은 연안부두 어시장이 문을 여는 첫날에 가게 문을 같이 열었다.

인천에는 언제부터 어시장이 생겼을까. 1933년 일본인들이 발행한 <인천부사>의 기록으로 그 시초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1887년에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아 경기도 남양에서 강화에 이르는 인천 앞바다에서 어로 행위를 시작했다. 일본 어선 15척은 1척당 은 10원 씩을 1년 수수료 겸 면허세로 냈다. 이렇게 잡은 물고기를 별도의 세금 없이 인천항에서 판매했다. 여기서 시작된 인천 어시장의 역사는 항구의 변천과 함께 연안부두까지 오게 되었다.

연안부두에는 팔미도를 오가는 유람선터미널에 해양광장이 큼직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러시아와 관련된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서막이 된 제물포 해전에서 일본군에 항복하지 않고 함대를 폭침시키면서 버텼던 바랴크호 승조원들을 비롯한 러시아 해군들을 추모하는 기념비와 러시아를 떠올릴 수 있는 상징 조형물들이다. 2011년에 인천시가 만든 상트페테르부르크광장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2019년 7월 개장한 인천광장이 있다. 러시아에 인천광장을 만들고 인천에 러시아광장을 건설하는 등 인천이 러시아와 대한민국 사이의 교류 상징도시로 떠올랐다. 이는 제물포해전 때 스스로 폭침시켜 수장한 바랴크호 깃발과의 인연에서 시작된 일이다. 2010년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바랴크호 깃발을 러시아 측에 장기 임대해 준 게 출발점이 되었다. 2013년 11월 저녁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인천 상트페테르부르크광장을 깜짝 방문하는 세계적인 이벤트를 연출하기도 했다. 러시아 주한대사관은 매년 2월 8일 인천 앞바다에서 바랴크호를 비롯한 제물포해전에서 숨진 러시아 해군들의 넋을 기리는 헌화 행사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