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는 옛 인천의 이름이기도 하다. 지금으로 치면 월미도와 올림포스호텔 주변의 내항 지역, 자유공원에서 신포동에 이르는 일대를 일컫는다. 개항기 인천을 오가던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불렀다. 제물포는 1883년 개항한 신항만 도시였다. 해외에서 서울로 가거나 서울서 해외로 나가는 여행객들은 제물포에서 하룻밤을 자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 인천에 들어선 이유다.
1888년 문을 연 대불호텔은 경인철도가 운행을 개시한 1899년까지 호황을 누렸다. 철도가 생기자 여행자들은 항구에서 하루를 더 묵을 이유가 없어졌다. 배에서 내린 뒤 곧바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 끊긴 대불호텔은 중국인들이 인수해 요릿집으로 바꾸었다. 중화루다.
인천항, 그러니까 제물포는 이렇듯 서울과 해외를 이어주는 역할만 한 게 아니었다. 서울과 평양을 연결해 주는 중간 지대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으로는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백령도나 연평도를 오가는 뱃길도 자유롭지 못한 판에 무슨 평양을 오가는 배가 있었겠느냐 싶다. 육로로 곧바로 가면 되지 굳이 하루를 묵어가면서 인천에서 배를 타고 서울과 평양을 다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도가 생기고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서울과 평양을 육로로 다니는 것이 인천을 거쳐 뱃길을 이용하는 것보다 두 배 정도 먼 길이었다.
실제로 서울과 평양을 인천항 뱃길을 통해 오갔던 얘기를 19세기 한반도에 와 있던 의료 선교사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 홀 부부는 1894년 갓난아기인 셔우드 홀을 데리고 평양을 방문할 때 제물포~평양 뱃길을 이용했다. 당시 서울에서 평양을 육로로 가려면 1주일 정도 걸렸는데 제물포에서 배를 타면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홀 부부와 동행한 박유산과 에스더 박 부부는 우리나라 의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에스더 박은 미국에서 공부한 첫 한국인 의사이고, 박유산은 부인의 공부를 외조했다. 서재필이 에스더 박보다 먼저 미국에서 공부한 의사였지만 그는 유학 중 귀화한 미국인이다.
홀의 얘기에 따르면, 1920년대 제물포에서 해주로 가는 배편도 있었다. 해주 병원에서 쓸 각종 기구와 보급품을 싣고 출항했다. 배가 오전 6시에 출발했기 때문에 홀 부부는 전날 서울을 떠나 제물포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해주까지는 육로로 가는 길이 어렵지 않았지만 멋진 해안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뱃길을 택했다고 전한다.
제물포, 인천항은 이렇듯 남과 북을 연결하는 중요 항구였다. 철길이 놓이기 전에는 서울과 평양의 중간지대 역할을 충실히 했다. 하지만 남북분단과 함께 그 뱃길도 끊기고 말았다. 남과 북이 자유로이 왕래하게 될 때 인천은 다시 그 중간 지대로 기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는 신항에 많은 기능을 내어준 인천 내항에 서서 영종도 방면으로 짙게 물드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남북 교통로로서의 인천항을 다시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