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가기 위해서는 염하를 건너야 한다. 염하, 짜디짠 바닷물이 흐르는 강이라 하여 예부터 그렇게 불렀을 게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 2개의 다리가 염하를 가로질러 김포반도와 강화를 연결한다. 이 염하를 지나면서 평양의 대동강을 떠올려본다. 염하에서의 신미양요와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붙어 있기 때문이다.
1871년 4월 14일, 조선군과 미군의 첫 교전이 있었다. 강화 염하의 손돌목 해역, 조선군은 광성진과 건너편 덕포진에서 미군 함대를 향해 포격했다. 미군은 함포를 쏘면서 퇴각했다. 덕포진의 포군 1명이 사망했다. 신미양요의 시작이었다. 미군은 아흐레 뒤인 4월 23일 초지진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어 덕진진을 손쉽게 함락시킨 뒤 광성진 공격에 나섰다. 어재연 장군이 분전했으나 전투력 차이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미군은 인근 마을로 가 방화와 약탈을 자행한 뒤 정박지인 월미도 앞 작약도로 되돌아갔다. 미 함대는 5월 16일 자진 철수했다. 신미양요 피해 상황은 조선과 미군 기록이 너무나 다르다. 조선은 아군 전사자 53명, 부상자 24명이라고 보고했지만 미군은 조선군 243명 사망, 미군 3명 전사, 9명 부상으로 기록했다.
미군 측이 신미양요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1866년 7월 대동강에서 있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이었다. 미국 상선인 셔먼호가 대동강에 침입해 교역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아대는 등 무력시위를 벌이다 조선의 화공작전에 격침된 사건이다. 배에 타고 있던 토마스 목사 등 여러명이 화난 평양 주민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은 셔먼호 사건 진상조사를 위해 몇 차례 조선에 함대를 보냈다.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그 사건 2개월 뒤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측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당시 한반도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프랑스가 미국에 고자질한 셈이다.
병인양요는 1866년 9월 프랑스 로즈 제독이 군함 7척과 1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 갑곶진에 상륙, 강화성을 점령해 금은보화와 각종 문서, 서적 등을 약탈한 사건이다. 양헌수 장군의 공격을 당한 프랑스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침략 1개월여 만에 인천 앞바다에서 철수했다. 프랑스는 9월의 강화도 침략에 앞서 8월에도 한강 깊숙이 침입해 왔다. 서강 어귀까지 왔다가 모래톱에 좌초되어 물러났다. 그때 1개월 전 대동강에서 있었던 셔먼호 사건을 전해 들었고, 중국 체푸항으로 돌아가 미군 측에 이 내용을 전달했다.
미국의 로우 공사와 로저스 제독은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해협에 나타나 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며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역사적 사건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절대로 혼자 오지도 않는다.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들과 연관되어 있다. 국가 간 외교의 중요성은 어제오늘이 다르지 않다는 교훈을 우리는 이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 그리고 신미양요에서 배울 수 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관련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19세기 우리나라에 와있던 서양 선교사들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90년대 초반 평양지역을 무대로 의료 선교활동을 벌였던 윌리엄 제임스 홀이 그의 부인 로제타 홀에게 한 이야기가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란 책에 언급되어 있다.
“닥터 홀은 아내에게 1866년 이 강에서 항해의 마지막 운명을 맞았던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홍수와 만조로 수위가 높았는데 셔먼호는 그것을 잘못 알고 보산을 지나 더 상류로 올라갔다. 닥터 홀은 평양의 대동문에서 셔먼호의 닻과 체인이 걸려 있는 것을 봤다고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조선 사람들은 그 물건들을 서양 배의 운명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는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있었다.”
철저히 서구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의미심장하게 들여다봐야 할 대목은 침몰한 셔먼호의 닻과 체인 등을 건져내 대동문 위에 걸어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대동문이 어떤 곳인가. 조선 후기 문인 신광수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관서악부》를 지었다. 그는 여기에 평양을 유람하며 읊은 <죽지사> 108수를 담았는데 제64주가 바로 대동문루다. 신광수는 대동문루를 '하늘 가운데 두둥실 떠 있는 것' 으로 묘사했다. 대동문은 홍건적 침입 때 불에 탔으나 조선이 건국된 뒤 다시 만들었다. 장삿배가 대동문 앞에 정박해 물자를 교역하는 등 평양성으로 들어가는 대표적 성문이었다.
1997년 북한을 방문한 유홍준 교수는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에서 평양의 정문답게 늠름한 기상이 서린 성문이라고 말했다. 유홍준 교수와 비슷한 시기에 평양에 갔던 최창조 교수는 쑥섬 근처 대동강가에서 '셔먼호 사건 기념비' 를 보았다고 《최창조의 북한 문화유적 답사기》에 썼다. 나도 2007년에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대동문도 ‘셔먼호 기념비'도 보지 못했다. 그때 그것들을 보았더라면 이 글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염하를 포함하는 인천 앞바다와 대동강은 분단 이전 하나의 물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걸 다시 복원하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