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대의 섬 강화는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도는 돈대의 섬이다. 강화대교를 건너든지, 초지대교를 이용하든지 강화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역사의 통로는 돈대다. 초지돈대나 용두돈대, 광성돈대 같은 곳은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돈대들이 100킬로미터
가량 되는 강화도 해안을 빙 둘러 54기나 있었다. 340년 전에 처음 만들어져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어 왔지만 지금까지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30기가 채 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강화에는 아직도 군부대가 주둔하는 조선시대 돈대가 있다는 것이다. 북한 땅이 마주보이는 강화 북쪽 민통선 내의 7기 정도가 그것이다. 조선의 군사들이 지키던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경계를 서고 있다니! 17세기 숙종 임금 때 쌓은 시설물을 우리 군이 방어 요새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다.
양사면 북성리 996번지 구등곶돈대에도 해병대원들이 주둔한다. 1679년(숙종 5년)
축조된 네모난 방형 돈대로, 둘레는 139미터쯤 된다. 허리를 숙여야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입구를 지나면 안내판이 나온다. 이곳을 진지로 쓰고 있는 해병대원 외에는 볼 사람이 없는데 한글과 영문 두 언어로 친절하게 써 놓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돈대란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관찰하고 대비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물을 말한다. 숙종 때 강화 전 해안을 하나의 방위체제하에 운영하고자 돈대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구등곶돈대는 지형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거북이가 기어오르는 듯한 매우 특이한 지형에 설치되어 있고, 전면과 좌우 측면으로 갯벌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어 외적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구등곶돈대 입구에서부터 해병대가 지키고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남쪽으로 하나밖에 없는 입구에 해병대원 이름표처럼 빨간 푯말로 '머리 조심'이라고 써 붙여 놓았다. 옛 기록을 보면 ‘구등돈은 둘레는 90보이고, 성가퀴는 46개이다. 북쪽으로는 작성돈과의 거리가 500보이다. 배를 댈 수 있다' 고 되어 있다. 여기서 옛날 길이 측정 단위인 90보는 요즘으로 치면 139 미터 정도 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강화도의 각 돈대를 연결시켜 방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돈대에는 포를 비롯한 각종 무기도 배치해 놓았다.
강화도는 고려시대부터 어떠한 외침에도 왕실의 안위를 지켜줄 보장지처로 인식되
었다. 1231년 몽골군이 침략하자 고려는 그 이듬해에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초원과 산악지대에서만 활동해온 몽골군은 바다 건너 상륙전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강화도는 38년간 전시수도로 기능했다. 강화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이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초토화되었다.
고려 왕실이 수도를 옮겨가자 개성에 살던 대다수 주민들도 강화도로 이사했다. 그때 이주한 인구가 10만 호 이상 수십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인구가 폭증했으니 식량난은 불 보듯 뻔했다. 농지 마련이 급선무였기에 대규모 간척사업이 시작되었다. 한반도 간척사업의 효시를 강화도로 꼽는 이유다.
고려시대 강화도 해안선은 지금보다 훨씬 굴곡이 심했다. 톱날처럼 들쭉날쭉해 배를 타고 침입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간척사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지면서 2개의 섬이 하나로 연결되기도 하고 해안선도 완만하게 바뀌었다. 그만큼 농경지는 늘어났다. 현재 강화도 면적의 30퍼센트 정도는 간척지가 차지한다는 분석도 있다. 고려 때 즉, 고릿적에 강화에서 시작된 갯벌 매립의 역사는 현대로 넘어와 인천의 신도시 개발로 이어졌다. 송도, 영종, 청라와 같은 신도시가 모두 갯벌을 메워 만들어졌다. 인천항 부지 주변도 대부분이 매립으로 형성되었으며 주안공단이나 남동공단 등지도 갯벌을 매립해 조성했다. 인천 곳곳에 매립지 아닌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몽골 침략 때 강화도로 피란해 고려 왕실과 집권층을 지켜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조선 역시 강화를 똑같이 여겼다. 하지만 생각만 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하기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인식으로 나라는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청나라 군사들이 날개를 달지 않는 이상 강화도를 넘볼 수 없다고 여기던 조선의 장수들은 이미 수군 운용술을 익힌 청나라 군대가 바다로 들이닥치자 걸음아 나 살려라 내빼기에 바빴다.
강화도가 무너지자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 임금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나라 홍30여 년 뒤 병자호란의 처참한 기억이 가시지 않았을 때 숙종은 강화도를 요새로 만들기 위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당했다.
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 중심에 강화 해안을 촘촘히 연결하는 돈대 축성 사업이 있었다.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기에 걸맞은 공간이다. 청동기시대 대표적 무덤 양식인 고인돌도 강화 부근리의 것이 가장 멋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여럿 있다. 마니산 단군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근현대까지 한반도 역사를 날줄로 꿰고 씨줄로 묶어 하나로 이을 수 있는 특이한 이력의 땅이다.
최근에는 서울에서 강화도로 커피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강화읍 신문리의 조양방직 공장 건물을 카페로 디자인하자 수도권의 커피 마니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흘러간 시간과 폐공장이라는 낯섦이 주는 독특함에 빠져들었다고 할까.
강화도에 웬 방직공장인가 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강화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대구보다 앞선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본고장이었다. 조양방직과 심도직물, 이화직물 등이 대표적인 강화의 섬유공장이다. 1959년에 나온 <경기사전>을 보면, 강화도에만 크고 작은 직물 공장이 70개가량 되었다. 이때 조양방직이 210명, 강화십자당직물이 144명, 심도직물이 130명의 종업원을 두고 있었다. 1960~70년대에는 규모가 커지면서 종업원도 크게 늘었다. 심도직물은 한창 때 1200명 넘게 일했다고 한다.
지금은 수건이나 행주를 만드는 영세 소창 공장 몇몇이 직물산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강화도에서는 공장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듣기 어려울 정도로 산업체 숫자가 줄었다. 강화군이 파악하고 있는 2019년 기준 강화도의 섬유제품 제조업체는 15곳이며, 종업원은 280여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