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 꼭대기는 왜 평평할까
제2경인고속도로 인천 시내 구간을 달리다 보면 문학산을 지나게 된다. 문학나들목이 바로 그 지점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과 포르투갈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가 열렸던 역사적 공간인 문학경기장도 문학산 자락에 있다.
인천 역사의 시작점도 이 문학산이다. 강화나 옹진, 부평, 계양, 서구 지역은 별도로 생각해야 할 문제지만, '인천의 역사가 2000년이 되었다'고 할 때는 그 연원을 미추홀에서 찾는다. 비류 백제 설화의 시작도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다. 16세기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인천도호부' 편을 보면 '고적' 항목에서 미추홀을 설명하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삼국사기>에 근거하고 있다.
주몽의 두 아들 중에 맏아들은 비류요 다음은 온조인데, 졸본부여로부터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행하니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드디어 한산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오직 이 한남의 땅이 북쪽으로 한수를 띠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비옥한 소택지대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천연의 험함과 땅의 이로움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비류가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고 온조는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위례성에 도읍하였다. 오랜 뒤에 비류가 미추홀은 땅이 비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정리되고 백성이 안돈되었다. 드
디어 부끄럽고 분하여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얘기하는 미추홀이 문학산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인천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썩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다. 신하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인천에 도읍을 세웠던 비류가 끝내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생이 있는 위례성에 귀부했다고 하니 말이다. 문학산 중턱에 아직도 일부 남아 있는 문학산성은 미추홀고성이나 남산고성으로 불리고, 정상에 있었다는 봉수대는 미추왕릉이라 부르기도 했다. 문학산 일원에서는 고인돌이 여러 기 발굴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문학산을 근거지로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비류의 무덤이 있다고도 전해지는 문학산을 가만히 바라보자면 여느 산 같지가 않다. 산의 정상은 대개 뾰족하기 마련인데 문학산은 꼭대기가 잘려나가 편편하다.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고 풀들도 자취를 감추는 겨울에는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꼭대기가 잘려나갔을까? 그에 대한 시조가 하나 전해진다. 인천 출신 시조시인이자 향토사학자인 소안 최성연이 문학산에 피어난 들국화를 보고 썼다는 〈들국화 2〉에 '하도 볶이다 못해 산마루도 깎였는데' 라는 구절이 나온다. 옛 모습을 차마 잊지 못해 철따라 들국화가 그 골짝에 피어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 하나를 증명해준다. 바로 1959년 시작된 문학산 미군부대 조성공사다. 문학산 꼭대기를 없애버리고 평평하게 만들어 미군부대를 앉혔다. '하도 볶이다 못해' 는 미군 내지 미국 당국의 조종을 받는 우리 정부의 위협적 압박이 인천시에 가해졌음을 고발하고 있다. <들국화 2>는 인천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문학산 미군부대는 1960년대 초반부터 운용되었다. 이 부대에 근무했던 한국군 병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평양을 타깃으로 하는 소형 전술핵을 탑재한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미사일의 사거리 200킬로미터는 인천과 평양의 직선거리와 맞먹는다. 문학산이 핵미사일 기지였다니 깜짝 놀랄 일이다. 미군이 떠나고 그 자리를 한국 공군부대가 넘겨받았는데 지금은 비어 있다. 2015년 인천시와 군 당국이 합의해 낮 시간에는 일반인도 산 정상을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했다.
문학산 정상에 올라서도 최성연이 말한 '이 고장 최고최대의 역사 유적' 은 찾을 길
이 없다. 미군은 부대 조성공사를 하면서 유물들을 따로 수습하지 않고 그냥 밀어버렸다.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이경성 선생이 남긴 자료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이 관장은 1949년 인천지역 곳곳에 있는 고적조사를 실시했다. 7회에 걸친 조사 중 첫 번째 지역이 문학산 방면이었다. 이 관장은 당시 봉수대, 문학산정 우물, 안관당 등 불과 10년 뒤에는 미군부대 조성 공사로 인하여 영영 사라져버릴 문학산 꼭대기의 유적들을 꼼꼼히 살피고 기록해 놓았다. 2012년 인천문화재단이 발간한 《인천고적조사보고서》(배성수 엮음)가 그 성과물이다.
이경성 관장의 고적조사 때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문학산 방면 첫날 조사는 오전 8시에 시작해 오후 7시에 끝났다. 학익국민학교(현 학익초등학교) 뒷산의 고려시대 사찰 학림사지 조사에서 일행은 '연우 4년 3월'이라고 적힌 기와 등을 발견했다. 1317년, 고려 충숙왕 시절의 유물이다. 학익국민학교 6학년 학생 두 명이 발굴작업을 구경하다가 문양이 있는 기와와 물고기 모양의 기와파편 등 다수의 유물을 발견했다. 이 관장은 그 두 명의 학생 이름까지 빼놓지 않고 보고서에 기록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우러져 유적지 발굴을 했다니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문학산 주변을 지날 때 산꼭대기가 평평해진 이유도 떠올리고, 문학산과 어우러진 여러가지 이야기들도 더듬어 살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