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교에 서서 자연과 도시의 공생을 생각하다.
송도국제도시와 영종도를 잇는 인천대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다. 총 길이가 21.4킬로미터, 바다 위에 뜬 부분만 18.4킬로미터다. 총 사업 기간 10년, 공사 기간만 따져도 2005년 7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4년이 넘는다. 사업비가 2조 4000억 원가량 투입된 엄청난 역사였다.
인천의 대표적 상징물 중 하나인 인천대교를 지나면서 우리는 그냥 바다만 보아서는 안 된다. 영종도 쪽 갯벌과 송도 쪽 갯벌의 차이를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바다 매립이 무엇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는 공간이 인천대교다.
오랜 세월 바다를 통해 드나든 역사도 생각해야 한다. 인천대교 아래 바다에는 물고기만 오고간 게 아니었다. 외세의 침략도, 개항시기 서구의 온갖 문물도 이 다리 아래 바다를 통해 들어왔으며, 우리나라의 수출입 물동량도 바로 이곳을 통해 드나들었다. 인천대교를 지나는 데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에 생각해야 할 게 무척 많다.
바닷물이 빠졌을 때 인천대교에서는 송도국제도시 쪽 해안과 영종도 쪽 해안,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썰물 때 영종에서 송도 방면으로 달리면 인천대교 요금소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갯벌이 드넓다. 물이 많이 빠졌다면 광활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넓어 갯벌 지대만 1분 30초 이상 달려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다. 인천대교의 상징과도 같은, 800미터 간격을 두고 우뚝 선 주탑 지점이 가장 깊은 곳이다. 높이 238미터가 넘는 주탑과 다리를 연결하는 굵은 케이블은 모두 208개다. 케이블로 다리 판을 비스듬히 매달았다고 하여 이를 사장교라고 한다.
주탑을 지나면 영종에서 본 바다의 모습이 다시 보여야겠지만 송도 쪽에는 갯벌이 없다. 그 갯벌은 송도국제도시가 깔고 앉아 있다. 송도국제도시 해안에서는 파도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는 해안으로 밀려드는 바닷물이 갯벌을 때리면서 내는 소리다. 송도에서는 갯벌이 사라지면서 바닷물이 일으키는 파도 소리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송도 개발 계획은 1979년 공유수면매립 기본계획이 수립되면서 시작되었다. 1984년 송도신도시 구상이 수도권정비기본계획에 포함되었다. 1986년에는 주거기능에 국제업무와 첨단산업단지를 동시에 조성하는 도시계획으로 바뀌었다. 송도지구의 계획상 면적은 53.4제곱킬로미터(1614만 평)이고 수용인구는 26만4000명이다.
1994년 9월 10일, 송도신도시 기공식이 열렸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행사에 참석했다.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그때 이야기를 자서전 첫 페이지에 실었다. 기공식을 며칠 남기지 않고 예정되어 있던 대통령의 참석에 문제가 생겼다.
“인천시 사업에 대통령이 굳이 갈 필요가 있겠느냐" 는 일부 중앙 부처 관계자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최기선 시장은 청와대 비서실로 전화를 걸었다.
“이건 인천이라는 한 도시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대사업입니다. 여의도 면적의 여섯 배가 되는 매립지에 최첨단 정보통신 도시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한국 최대의 공항과 항만을 거느린 세계 전진기지의 첫 삽을 뜨는 날인데, 대통령이 오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인천 송도 앞바다 매립 신도시 조성' 기공식에는 대통령이 참석했다. 비가내렸다. 당시 사진을 보면 YS는 경호원이 우산을 뒤에서 씌어주고 있는데, 최기선 시장은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뒤로도 대통령들은 송도에서의 큼지막한 행사에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송도국제도시는 인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매우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송도국제도시 개발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갯벌과 파도 소리를 함께 말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20만 명의 사람이 갯벌을 메워 살기 시작하면서 원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2천만의 게, 낙지, 조개, 소라들이 터전을 잃었다는 점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천대교에서 바라보는 송도, 스포트라이트가 강한 만큼 그 그늘도 짙은 법이다.
인천대교가 송도와 영종을 공간적으로 잇는다면 그 아래 흐르는 바닷길은 오랜 시간을 잇는 역사적 물길이다. 참으로 많은 나라의 전선들이 오고 갔다. 660년 삼국시대, 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대군이 신라군과 회합한 뒤 이 바다를 지나 백제로 향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도 이 바닷길을 지난 프랑스군과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 1875년 운요호 사건 당시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곳이 영종도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 역시 이 바다가 시작이었다.
당시 인천 앞바다는 군사적으로 긴박한 공간이었다. 세계 각국이 인천항에 군함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인천에 와 있던 영국계 저널리스트 앵거스 해밀튼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1901년 제물포 인천항에는 93척의 군함이 입항해 있었다. 그 중 35척이 일본, 21척이 영국이었다. 러시아는 15척, 프랑스는 11척, 오스트리아가 5척, 독일이 4척이었으며 이탈리아와 미국이 각각 1척씩의 군함을 인천에 보내 놓고 있었다. 이들 파견 군함의 숫자는 그들 나라가 품고 있던 한반도 침략 야욕의 크기와 비례한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국제정세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조선은 나라를 일본에 강탈당하고 말았다. 해방 후 빚어진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신호탄은 인천대교 바로 앞 팔미도 등대의 장악이었다.
인천대교에서 바닷바람 스치듯 살펴본 전쟁의 역사는, 그때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 텐데, 그때 이렇게 해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구나 하는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게 한다. 공간을 연결하고 거기에 더해 시간마저 이어주는 인천대교는 그 자체로 전혀 다른 차원의 전쟁기념관으로 삼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