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도에 유배된 독립운동가. 이동휘와 계봉우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 중 하나가 인천 국제공항이다. 국내외 여행객들로 붐비는 대한민국의 관문. 뭍에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 가려면, 인천대교나 영종대교를 건너야 한다. 지금은 영종도라는 거대한 섬이 되었지만, 공항이 들어서기 전에는, 영종, 용유, 삼목, 신불, 4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4개 섬을 하나로 묶
어 매립해, 공항을 건설한 것이다.
사시사철 사람으로 혼잡한 영종도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였다는 점에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다. 알려진 바로는 영종도 예단포에서, 독립운동가 계봉우가 1년여 유배생활을 했고, 그보다 먼저 영종도 건너 무의도에서, 이동휘가 유배를 살았
다. 이동휘는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무의도 유배형을 받았고, 계봉우는 1916년을 영종도에 갇혀 지냈다.
이동휘 선생의 무의도 유배 이야기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도 나온다. 백범은 안악사건을 설명하면서, '이동휘,이승훈,박도병,최종호,정문원,김병옥 등 19인은 무의도, 제주도,고금도,울릉도 등으로 1년 유배가 결정되었다'고 사건 결과를 썼다. 누가 무의도에 유배되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요즘 무의도 주민들은 독립운동가가 무의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잘 알지 못한다. 용유도와 무의도 얘기를 다룬 어떤 향토지에서는 이동휘가 무의도에서 은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유배와 은거는 전혀 다른 말이다.
이동휘는 무의도 유배가 그렇게 낯설지 않았을 듯하다. 무의도에서 가까운 강화도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기에, 강화도의 지인들이 일제의 눈을 피해 무의도로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함경남도 단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동휘는 1895년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강화도 진위대장이 되었으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과 함께 사임했다. 곧바로 강화도에서 육영사업을 벌이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강화도 의병활동에도 깊숙이 개입했는데, 이때 유배처분을 받은 듯하다.
1913년에는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 세력을 규합, '대한광복군 정부'를 조직했다. 이상설에 이어 제2대 정도령을 맡기도 했다. 공산당 계열 독립운동 조직을 이끌던 이동휘는, 1935년 1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병사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보름이 지난 1935년 2월 15일 자에 '이동휘 씨 장서'란 제목으로 63세를 일기로 별세한 사실을 전하면서 애도했다. 이동휘의 애국혼은 강화에서 응축되었으며, 무의도 유배 기간에 더욱 농익은 것으로 보인다. 이동휘를 말하면서 인천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인천 독립운동사에 빠져 있는 인물, 계봉우. 그에 대하여도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알아봐야 한다. 계봉우라는 인물이 그저 러시아 방면에서 국사학자, 국어학자, 민속학자, 교육자, 언론인 등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정도로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함경남도 영흥 출신인 계봉우는 1911년 1월, 이동휘와 함께 간도로 이주해 교편을 잡았다. 그 뒤 연해주로 옮겨 '권업신문' 기자와 대한 광복군 정부의 비서로 활동했다. 1916년 1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구인됐고, 영종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917년 12월, 석방된 뒤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서 거주 제한 조치를 당했다. 1919년 초에는 3·1운동을 준비하던 인물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계봉우의 유배생활은 제대로 드러난 자료가 없다. 그의 자서전 《꿈 속의 꿈》에 일단이 보일 뿐이다. 계봉우는 유배지 예단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했지만, 일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아, 뱃일 막노동으로 밥벌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을 잘 해내지 못하는 그를, 예단포 사람들이 도왔고, 계봉우는 그 내용을 자서전에 기록해 두었다.
인천은 168개의 크고 작은 섬들을 품고 있는 다도해의 도시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가 41곳이다. 옹진군에 23곳, 강화군 12곳, 중구 5곳, 서구 1곳 에 2020년 2월 말 기준 18만27명이 살고 있다. 어떤 시인은 섬을 일러 '물 울타리를 둘렀다'고 표현했는데, 인천은 섬으로 울타리를 쳤다. 도심을 보호하려는 듯 울타리를 겹겹이 둘렀다.
인천의 섬 중에는 제 이름보다도 '서해5도'라고 뭉뚱그려 불리는 곳들이 있다. '서해 최북단'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고, 북방한계선을 말하는 'NLL'과도 짝을 이룬다. 바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가 그 주인공들이다. 우도만 강화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옹진군이다.
우도는 앞에서 얘기한 유인도 41곳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도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섬을 지키는 해병대원들이 주둔하고 있다. 무인도로 분류되는 이유는 주민등록을 둔 주민이 없기 때문이다. 2009년 3월, 취재를 위해 우도에 들어갔다. 연평도 짜장면집 주인과 중구 신포동 닭강정집 사장의 해병대원 위문 봉사활동에 동행한 것이다. 썰물 때는 갯벌 위를 걸어, 북녘을 오갈 수 있을 듯이 가까웠다. 이처럼 지척에서 북한군과 마주하기 때문에 우도의 군인들은 늘 긴장 상태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 짜장면과 닭강정을 푸짐하게 들고 온 봉사단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인천에서 뱃길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서해 최북단 백령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이라고 할 만하다. 사곶천연비행장, 콩돌해안, 감람암 포획 현무암, 물범, 네 가지는 실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사곶천연비행장은 이탈리아 나폴리해안과 더불어 세계에서 두 곳뿐인 백사장 활주로다. 썰물 때의 활주로는 길이 3킬로미터, 폭 200미터로 나폴리보다 크다. 6·25 전쟁 당시에는 물론이고 군사통제구역에서 해제된 1989년 초까지 군용비행장으로 쓰였다.
바닷물이 오랜 세월 들락거리며 다져낸 단단함이 얼마나 강한지 대형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 천연비행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인공비행장 건설 사업이 추진 중이다. 작은 섬에 천연비행장과 인공비행장이 같이 있는 곳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콩돌해안에서는 눈 호강만 할 것은 아니다. 백령도의 파도가 오랜 세월 옥처럼 빚어낸 혐형색색의 자갈들은, 여기가 아니고는 들을 수 없는 천연의 오케스트라 선율을 들려준다. 파도가 밀려들었다가 나갈 때, 수많은 자갈들이 살짝살짝 오르내리게 되는데 파도치는 소리와 돌 부딪히는 소리가 참으로 묘한 화음을 낸다.
백령도에서 가까운 대청도와 소청도 역시 수도권에 묶여 있으면서 저 멀리 제주도만큼이나 색다름을 주는 섬들이다. 백령도를 오가는 배편이 두 섬에도 들르기 때문에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 여행은 하나로 묶어서 하는 패키지 상품이다. 대청도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함께 섬을 빙 둘러 곳곳에 펼쳐진 해변들이 특별하게 아름답다. 사탄동해변으로 불리기도 하는 모래울해변, 농여해변, 미아동해변, 지두리해변, 옥죽동해변, 답동해변 등은 섬 여행자라면 꼭 둘러봐야 할 곳들이다.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는 대청도 동백나무 자생지는 4월 중순에 만개해 절정을 이루는 천연기념물이다. 옥죽동 모래사막은 바닷가가 아닌 산 중턱에 모래언덕이 드넓게 펼쳐진 기이한 장면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옥죽포해변의 모래를 바람이 산으로 날려 쌓인 게 사막을 만들었다니,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 싶다.
소청도는 기암괴석의 섬이다. 흰색의 대리석이 띠 모양을 이루는 '분바위 해안은 밤에 진가를 발휘한다. 달빛에 비치는 모습이 얼마나 뽀얀지 '월띠’라고도 불린다. 달빛이 없는 그믐밤에도, 그 하얀 모습이 빛을 내 밤에 들어오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할 정도라고 한다. 이 대리석 띠는 8억7천만 년 전의 지층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환경부는 2019년 7월 백령도의 두무진과 대청도 해안사구, 소청도 분바위 등 10곳을 묶어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했다. 인천시는 관광 인프라와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 인증을 추진 중이다.
서해5도의 하나라고는 하지만 연평도로 가는 뱃길은 따로 있다. 인천항에서 145킬로미터, 2시간 30분 정도 가야 한다. 연평도라는 이름은, 기차가 달리는 것처럼 평평하면서 길게 뻗친 모양을 띠고 있어 붙었다고 한다. 소연평도와 대연평도로 나뉘는데, 인천에서 가는 배는 소연평도에 먼저 들른다. 소연평도에서는 사람 얼굴 형상을 한 얼굴바위가 먼저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대연평도 선착장은 당섬에 있고, 당섬에서 대연평도까지 연륙교로 이어진다.
대연평도의 절경이라면 병풍바위와 가래칠기해변을 들 수 있다. 조기역사관에 올라 북서쪽 해변을 바라보면 자연이 빚어낸 병풍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구리동해수욕장, 등대공원, 빠삐용절벽 등 시간 내서 구경할 만한 명소들이 많다. 2010년 북한군의 느닷없는 포격으로 파괴된 현장에는, 안보교육장이 세워졌고, 북녘이 손에 잡히는 방향전망대도 있다. 봄이나 가을에 연평도를 찾는다면 꽃게를 먹어야 한다. '조기의 섬'에서 '꽃게의 섬'으로 변신한 연평도의 꽃게 맛은 도심에서 먹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덕적도와 문갑도, 굴업도, 소야도, 백아도, 울도, 지도 등 덕적군도의 절경도 여행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손색이 없다. 소나무 숲이 일품인 서포리해변, 갯바위 낚시에 제격인 소재 해변과 밧지름해변, 자갈을 밟으며 해수욕도 즐길 수 있는 능동자갈해변, 덕적군도의 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비조봉 등 둘러볼 곳이 많다.
섬 마을 풍경 속에서 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서울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섬은 신도, 시도, 모도다. 섬들이 연도교로 이어져 삼형제섬이라 부르기도 하고 세 섬의 이름자를 하나씩 따 '신시모도'라 부르기도 한다.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0분이면 신도선착장에 닿는다. 신도선착장 주변에는 자전거 대여소가 여러 곳 있다. 자동차를 가져오지 않아도 하루 코스로 여행하기에 딱 맞는 에코 섬이라 할 수 있다.
신시모도에 장봉도를 더하면 행정구역으로는 옹진군 북도면이 된다. 그런데 그 이름이 영 어색하다. 옹진군의 북쪽에 있는 섬이란 말인데 신시모도와 장봉도는 옹진군의 동쪽에 있다. 예전에는 신시모도, 장봉도가 강화에 속해 있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부천군에 편입되면서, 부천군의 북쪽에 있는 섬이라 하여 북도면으로 칭했다. 1973년 경기도 옹진군에 포함되었고, 인천에 속하게 된 시기는 1995년 3월 1일이다. 현재 영종도에서 신도를 거쳐 강화에 이르는 도로개설 사업이 추진되고 있어 앞으로는 배를 타지 않고 신시모도에 오갈 수 있게 될 예정이다.
앞에서 인천의 유인도가 41개라고 했는데 이 중 특이한 이름을 가진 섬이 하나 있다. 40개가 '무슨무슨 도'라고 하여 섬 도자로 끝나는데 강화군의 '섬돌모루'만은 섬 도 자를 쓰지 않는다. 강화에서 석모대교를 타고 석모도에 들어가면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다. 원래는 무인도였는데 1980년대 후반 이곳에 가족호텔을 비롯한 휴양지로 개발하기 위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관리인이 주소를 옮겨 유인도가 되었다. 5공 시절 정권 핵심부에 있던 사람의 가족이 이 섬을 사들였다.
이후 전기가 들어가고, 전화 회선도 깔렸다. ‘섬돌모루’란 이름의 회사도 만들었는데, 정권이 바뀐 뒤 1990년대 초반에 이 회사 임직원 3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섬을 관리하던 이가 세상을 떠나면서 무인도가 되
인천 인문여행 #5 배다리에서 인천의 옛 모습을 만나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을 먼저 들렀다가, 20분쯤 걸어 배다리로 가면, 이 동네의 옛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약간 높은 언덕 같은 수도국산은 인천 최초의 상수도 시설인 송현 배수지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노량진 정수장에서, 여기까지 물을 끌어와 수돗물을 공급했다. 달동네 박물관은 인천 구도심, 특히 동구 지역의 1970년대 어름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창영초교에서 배다리 헌책방 삼거리 쪽으로 가다보면, 왼편으로 옛 인천 양조장 건물이 보인다. 바깥에는 커다란 양철 로봇이 지키고 있다. 스페이스 빔이라는 지역 문화단체가 쓰고있다. 헌책방 삼거리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 동구청 방향으로 성냥 박물관이 있다. 규모는 아주 작지만, 우리나라 성냥 산업의 역사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공간이다.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활기가 돌고 있다. 1970년대부터 이곳에서 헌책방을 지켜온 아벨서점 곽현숙 사장을 비롯한 마을 주민, 동구청, 특히나 이곳을 찾아주는 손님들이 합작해 일궈낸 결과다. 동구청은 배다리의 외관부터 바꾸기 위해, 많은 사업비를 투입하고 있다. 식당과 각종 공방이 들어서고, 카페들도 잇따라 문을 열고 있다.
헌책방에 들어가면 책장에 꽂힌 책이 나를 부르는 신호에 감전될 때가 있다. 사고 싶은 책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그 책과 딱 눈이 맞는 순간이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헌책방이 주는 신비로운 체험이다. 헌책방거리에서 동인천역 방향으로 오른쪽 모서리를 돌아가면 1950년대 유명 잡화점이었던 조흥상회 건물이 있다. 청산별곡 등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되살려낸 이 건물에는, 나비날다 책방 등 작은 서점과 전시장이 들어섰고, 지금은 문화유산 국민신탁에서 매입해, 공공재로 탈바꿈할 도약을 준비 중이다.
인천 짠물의 진수 소금밭
흔히 인천사람을 '인천 짠물'이라고 부른다. 인심이 야박하고 인색하다는 부정도, 맹물보다 야무지고 근성 있다는 긍정도 함께 품고 있는 별칭이다. 하지만 인천이 소금의 본고장이었기 때문에, 짠물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인천은 예로부터 곳곳이 소금밭이었다. 주안염전에서 천일염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 남동 염전, 군자 염전, 소래 염전 등이 잇따라 들어섰다. 주안 염전은 1909년, 88 정보 이후 계속 증축해, 총면적이 212 정보에 달했다. 남동염전은 1921년, 300정보 규모로 만들어졌고, 군자염전은 1925년 575 정보로 시작해 603 정보로 늘렸다. 이들 주안, 남동, 군자 염전은 관영이었다.
염전들은 갈수록 규모가 커져, 《인천부사》에 따르면 이 세 곳에서 생산한 천일염이 당시 한반도 전체 수요의 21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한다. 소래염전은 1934~1945년 사이에, 549 정보 규모로 만들어졌다가, 600여 정보까지 증축했다. 용현동과 숭의동 일대에도 염전이 계속 만들어져, 인천의 해안 대다수가 천일염전 지대가 되었다.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를 앞세워 천일염전을 조성한 것은, 호렴으로 불리던 값싼 중국 소금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소금은 일본으로 수탈해 가는 중요 물자였으며, 이는 군수품 조달에 꼭 필요한 염화나트륨 등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염화나트륨은 폭약 등 각종 무기의 제조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초 품목이다. 일제가 중국과 전쟁을 벌이던 1941년 화약, 뇌관 제조 공장인 조선유지 화약공업을 소래염전과 가깝고, 남동염전과 맞닿아 있는 인천 고잔동에 설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천의 조선유지 화약공업 공장은 한국화약의 모태가 되었다. 소래포구와 가까운 곳에 있던 한국화약 공장 터 자리가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변모했다. 최신식 주거지역에서, 우리나라 화약산업의 역사와 소금밭 이야기를 연결하게 되다니, 참으로 별일이다 싶다.
천일염 이전에도 인천은 소금으로 유명했다. 바닷물을 끓여 얻는 자염방식이었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인천도후부' 편에는, 인천의 주요 특산물 중 하나로 소금을 꼽고 있다. 또 고려시대 문인 이곡의 시를 인용해, 자연도, 즉 영종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금 굽는 대목이 나온다. 영종도 쪽으로 뱃놀이를 갔던 모양이다.
‘가다가 자연도를 지나며, 삿대를 치고, 한 번 한가하게 읊조린다. 갯벌은 구불구불 전자 같고, 돛대는 종종 꽂아 비녀와 같도다. 소금 굽는 연기는 가까운 물가에 비꼈고, 바다 달은 먼 멧부리에 오른다. 내가 배타고 노는 흥이 있어, 다른 해에 다시 찾기를 약속한다.’
바닷물의 소금기를 가득 머금은 함수를 솥에 넣어 끓이기 위해서는, 땔감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했다. 따라서 소금 생산을 위해서는 해안가, 특히 나무가 무성한 지역마다 염부를 두었다. 인천에도 이런 곳이 많았을 게 틀림없다. 육지의 해안가는 물론이고, 섬 지역의 해안가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이 소금 만드는 일에 매달린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소금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금은 그 이름부터 아주 귀하게 인식되었다. 소금 염 자는, 신하가 소금을 그릇에 담아 두고, 지키는 모양에서 비롯했다. 서양 역시 마찬가지다. 월급쟁이를 뜻하는 샐러리맨의 샐러리가, 소금에서 왔다. 고대 로마의 병사들이 급여를 소금으로 받았던 데에서 연유한 듯하다.
소금은 우리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다. 전쟁 중에도 소금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략물자였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소금과 관련한 기록이 여러 곳에 보인다. 전선에서 중요한 일을 처리한 장졸들에게, 하사품으로 '술 쌀 10말과 소금 1곡'을 보내기도 했다. 1곡은 10말이다. 쌀과 소금의 양을 똑같이 했다는 것은, 그 값어치가 같다는 얘기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소금값은 쌀값과 맞먹었다. 조선시대 선비 오희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피란살이를 하면서 쓴 일기 《쇄미록》에, 소금값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다.
1596년 12월 9일 자에, '소금 13두를 팔았더니 쌀 12두 6되이다' 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귀한 소금을 자체 조달하기 위해, 위수 지역의 섬에 염장을 설치했다. 염장을 관리하는 감독관과, 소금을 굽는 사람들을 별도로 배치했고, 소금이 나면 각 예하부대에 적절히 분배했다. 거북선만으로 일본군을 상대한 게 아니었다.
임진왜란 발발 360년 뒤, 그러니까 1950년대 초·중반, 인천에는 섬마다 염전이 만들어지다시피 했다. 시도염전이 그 전형을 보여준다. 시도에서 오래 산 노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섬 주민 모두가 나서서, 갯벌에 둑을 쌓아 염전을 일구었다. 1951년 1·4후퇴에서 복귀한 이후,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남자는 돌덩어리와 흙을 등에 지고 날랐고, 여자와 아이들은 머리에 얹거나, 가슴팍에 안고 날랐다. 동네사람 모두가 나선 것은 밀가루나 보리쌀 같은 먹을 것을 일당으로 받기 위해서였다. 샐러리맨의 어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당시 일한 주민들이 받았던 밀가루와 통밀을 '480 양곡' 이라고 불렀다. 'PL 480', 미국이 1954년 법제화한 '잉여 농산물 원조법'에 따라, 자국 내 남아도는 농산물을 처리하기 위한 지원 양곡이었다. 시도염전이 토지대장에 등재된 것은 1959년이다. 지목은 염전, 면적은 15만 1753제곱미터였다. 《옹진군지》에 따르면, 이렇게 조성된 옹진군 내 염전이 1987년 4월 기준으로, 총 53개였다.
인천의 대다수 염전지대는 공단지대 혹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주안 염전은 1968년 주안 공업단지로, 남동염전은 1980년대 남동공단으로 바뀌었고, 소래염전은 1990년대 중반,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거리 곳곳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주염로, 염창로, 염전로, 염골 근린공원 사거리 등의 지명은, 그곳이 한때 염전이었다는 사실을 혼잣말처럼 전해준다. 사람들은 무심코 그 길을 지나친다.
현재 인천에 남은 상업용 염전은 중구 을왕동의 동양염전과, 옹진군 시도의 시도염전, 둘 뿐이다. 이곳도 일하는 염부들이 턱없이 부족해 언제 문을 닫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백령도의 백령염전은 노동력 부족으로, 2017년 가을부터 생산이 중단되었고, 인천광역시 대공원 사업소가 운영하는 남동구 소래습지생태공원 염전은 관광체험용 시설이다. 인천지역 천일염 생산량은, 2016년 1020톤, 2017년 820톤, 2018년 775톤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아무래도 인천에는 소금박물관이 필요해 보인다. '짠물' 인천의 속살 같은 도시 변천사를 깊숙하게 그려낼 수 있도록 말이다.
막걸리와 헌책방의 상관관계 소성주와 배다리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그 지역 음식과 술을 맛보는 것이다. 인천은 막걸리 소성주가 유명하다. 인생을 소풍에 비유했던 시인 천상병은 읊었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라고.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이보다 더한 막걸리 예찬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막걸리 역사는 어디까지 올라갈까. 문헌상으로는 고려시대에도 막걸리와 유사한 술이 있었다. 1123년 고려에 외교사절로 왔던 송나라 문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나온다. 질그릇 술독 항목에서, 고려의 술 이야기를 한다.
‘고려에서는 찹쌀이 없어서 멥쌀에 누룩을 섞어 술을 만드는데, 빛깔이 짙고 맛이 진해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왕이 마시는 것을 양온이라고 하는데 좌고에 보관하는 맑은 법주 이다.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질그릇 술독에 담아서 누런 비단으로 봉해 둔다. 대체로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지만, 좋은 술을 구하기가 어렵다. 서민의 집에서 마시는 것은 맛이 텁텁하고 빛깔이 진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마시고 모두들 맛있게 여긴다.’
서긍이 말하는 '서민의 집에서 마시는 텁텁하고 진한 빛깔'의 술, 우리가 요즘 마시는 막걸리를 설명한 느낌이다. 서긍은 고려에 들어올 때 하루, 귀국하는 길에는 6일이나 인천 영종도에서 묵었다. 영종도는 그 시절에는 자연도라 했는데, 제비들이 많아 그렇게 이름 붙었다고 한다. 붉은 노을에 비친 제비가 마치 자줏빛으로 보였기 때문이리라. 영종도에 머물며 먹은 음식에 대해서는 '음식은 10여 종인데 국수가 먼저이고 해산물은 꽤 진기하다. 그릇은 금, 은을 많이 쓰는데, 청색 도기도 섞여 있다. 쟁반, 소반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했다'고 적었다. 고려의 접대가 푸짐했던 모양이다. 국수를 맨 먼저 냈다는 것이 특이하다.
서긍이 고려에서 보았다는, 술을 담아서 보관하는 질그릇 독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커다란 항아리 임에는 분명하다. 딱 그 질그릇 독을 떠올리게 하는 커다란 항아리를 몇 년 전, 인천 옹진군 시도의 양조장 취재를 갔다가 본 적이 있다. 북도 양조장이었는데, 거기서는 도촌주라고 하는 시도 막걸리를 제조해 팔고 있었다. 이름 자체가 '섬마을 술'이니 정답기 그지없다. 양조장 대문 밖 담벼락 아래에는 아주 오래된 용기를 거꾸로 엎어놓았다. 밑이 깨져서 쓸 수 없는 것을 광고판처럼 양조장 상징물로 쓴 것이다. 가만히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일제시기에 만든 막걸리 제조용 용기가 아닌가. '쇼와' 표기가 선명했다.
쇼와 연간은 1926년부터 1989년까지이다. 해방 이후에 제작했다면 쇼와 연호를 새기지 않았을 터다. 그렇다면 1926년부터 1945년 해방 이전에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막걸리를 숙성시키는 발효실에도 똑같은 항아리들이 여러 개 있었다. 표면에는 '경기 개량 옹천형' 이라고 쓰여 있었다. 서울과 경기 지역의 전통적인 용기 양식을 개량해 만들었음을 알려준다. 그 아래로는 술의 용량과 담근 시기 등을 적을 수 있는 칸을 세로로 표기해 두었다. 사람도 많이 살지 않는 섬에서 일제시기에 제작된 막걸리 항아리를 마주한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일제는 이 항아리에 적힌 쇼와 연간이 시작되던 1926년에, 술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누룩 제조업자 합동 정리를 단행했다. 인천에서는 그 이듬해에 ‘인천누룩제조조합'이라는 회사가 만들어지고, 공장이 들어섰다. 판매구역은 인천부, 부천군, 강화군, 김포군이었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행정구역이 거의 포함되어 있다. 시도에 양조장이 들어선 것은, 화려했던 조기 파시와 관련이 깊다. 조기 떼를 따라 수많은 어선과 어부들이 섬으로 몰렸으니, 거기에 술이 빠질 수 있겠는가. 조기를 잡으러 사람이 왔고, 그 사람들을 좇아 외딴 섬에까지 양조장이 들어온 것이였다.
인천을 대표하는 막걸리, 소성주는 인천의 옛 이름에서 따왔다. 신라 때 인천을 부르던 이름이 소성이었다. 《삼국사기》 '소성현’ 항목을 보면, '본시 고구려 매소홀현 인데, 경덕왕이 개명했으며, 지금의 인주, 경원매소 라고도 하고 ‘미추’ 라고도 한다 ' 라고 했다.
이 소성이라는 이름을 막걸리에 붙여서일까, 아니면 맛이 으뜸이어서일까, 소성주는 인천을 대표하는 술로 우뚝 섰다. 소성주라는 이름은 1990년에 생겨났다. 우리나라 업계 최초로 출시한 100퍼센트 쌀막걸리의 첫 상표에 '소성주' 라고 한자로 썼다. 그 전에는 그냥 '인천 막걸리'였다.
소성주를 만드는 회사는 '인천탁주'다. 1974년 대화주조, 동영주조, 부림주조, 부천양조, 영화양조, 인천양조, 주안양조, 창영양조, 계림주조, 태안양조 등이 합쳐 하나의 회사를 만들었다. 공장은 부평구 청천동에 있고 대화주조 출신 정규성 대표가 이끌고 있다. 그는 한국 막걸리협회 회장도 맡고 있다.
참여자들 중 가장 오래되었으면서, 옛 양조장의 공장 모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인천양조다. 인천 동구 배다리에 있다. 헌책방거리 삼거리에서 창영초등학교 쪽으로 가는 골목 초입의 2층짜리 건물이 옛 양조장이다. 그 앞에는 로봇 모양의 양철 조형물이 서 있어서 외지인들도 찾기 어렵지 않다. '인천양조 주식회사'라고 한자로 쓴 문패도 아직 걸려 있다.
양조장과 왼쪽으로 맞붙은 한옥은 주인이었던 임영균 선생 가족이 살던 집이다. 임영균 선생의 장인 최병두 선생이 1920년대에 설립했던 것을, 집과 양조장 그대로 사위가 떠맡았다. 임영균 선생은 일제시기 치과의사이면서 언론인으로, 또 문화인으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인천의 대표적 인물이다. 《경기사전》에 나온 이력에는 맡은 직책이 7가지나 된다. 인천양조 주식회사 사장을 인천 언론 역사의 큰 뿌리를 이루고 있는 '주간 인천 사장'에 이어 두 번째로 적은 걸 보면, 당시 양조장 사장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임영균 선생이 살던 집과 인천 양조장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7년 7월이었다. 그때는 며느리와 손자가 살고 있었다. 양조장 건물은 '스페이스 빔'이라는 문화단체가 입주하기 위해,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인천 양조장이 있는 배다리는 인천의 대표적인 헌책방 거리이다. 잘 나가던 시절에는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거리로 꼽혔다. 헌책방은 6·25전쟁 직후인 1953년 창영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노점 형태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배다리에 가게 형태로 자리를 잡았고, 헌책방 수도 늘어났다. 한창 때는 40여 곳이 성업해 부산 헌책방 장수들이 와서 책을 사가기도 했다. 봄 신학기가 되면, 학생들이 줄을 서서 책을 사 '봄에 벌어 1년을 먹고 산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아벨서점을 비롯해 5곳 정도만 남았지만,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서 지난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배다리의 헌책방거리와 양조장, 같은 동네에 있다는 것 말고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임명균 선생이 등장하는 순간 얘기가 달라진다. 선생의 선친이 인천에서는 최초로 책방을 했기 때문이다. 책을 파는 서점이라기보다는 빌려주는 세책이었다. 그 책도 인쇄하고 장정한 게 아니라 창호지 같은 데다 목판으로 찍거나 붓으로 쓴 뒤 묶은 것이였다. 삼국지, 유층열전, 옥루몽, 수호지, 춘향전, 심청전 따위의 소설책이 많았다. 하루 빌리는 데 동전 한 푼이면 되었다. 저녁에 밤잠을 먹어가면서, 등잔불 아래 가족이나 이웃끼리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출하다. 김구 이야기 1
인천에는 중봉대로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기리는 도로 명칭이 더 있다. 백범 김구의 호를 딴 백범로도 그중 하나다. 인천 한복판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다. 인천은 백범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공간이다. 그는 인천에서 옥살이를 두 차례 했는데, 첫 번째 옥살이 이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그래서일까. 김구는 《백범일지》에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다.
백범은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보복 차원으로, 일본군 중위 스치다를 죽였다. 두 달 뒤,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갇혔다가, 외국인 사건을 다루는 인천감리서로 이송되었다. 법무부에 해당하는 법부는 백범을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고종에게 건의했다. 고종이 판결을 보류했지만 사형수나 마찬가지 신세였다. 인천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뜻을 모아 구명운동을 벌였다. 강화의 김주경이 앞장섰다. 김주경은 재산을 팔아가며 구명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실패하고 만다. 물상객주 박영문과 안호연도 나섰다. 이들은 옥바라지 하는 백범의 어머니를 돕기도 했다. 김주경은 구명운동이 먹혀들지 않자, 탈옥을 권유하는 시를 지어 옥에 갇힌 백범에게 주었다.
백범의 탈옥 뒤에는 김주경을 비롯한 인천 사람들이 있었다. 백범은 말했다. “김주경이 그같이 자기 전 재산을 탕진해 가며 내 한 목숨 살리려 했던 것도 그렇고, 인천항에 사는 사람들 중 한 사람도 내가 옥중에서 죽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없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2년여를 인천 감옥에 있으면서, 백범은 자신을 위한 구명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사회적 책임감을 크게 느꼈다. 옥중에서 《대학》 등 전통 학문을 더 익히면서 《세계역사·지지》, 《태서신사》 등 신 서적도 읽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품어온 척양의 판단이 편협했음을 깨달았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소장을 대신 써주는 대서일도 했다. 인천에서의 첫 번째 감옥 생활은, 백범이 하층민과 함께하는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성장하는 데 전환점이 되었다.
김구는 극적으로 무기수로 감형받고, 1898년 3월,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옥했다. 스물셋 김구는 탈옥을 결심하자마자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탈옥 과정을 되짚어 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눈에 띈다.
1단계로 삼릉창을 준비했다. 김구는 탈옥을 앞둔 어느 날, 면회 온 부친에게 "대장장
이에게 한 자 길이 삼릉창 하나를 만들어 달라 해서 새 옷 속에 싸 들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 삼릉창은 김구가 감옥 바닥에 깔린 벽돌을 들추고, 땅속을 파내는 도구가 되었다. 창끝의 모서리가 셋인 삼릉창은 조선 후기 국방 무기 중 하나로, 벽돌을 들출 때 날이 부러지는 사고를 막기에 제격이었다. 삼릉창 얘기는 120년이 넘도록 주목한 사람이 없었다. 삼릉창을 튼튼하게 만들어낸 인천의 대장장이는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김구 탈옥의 결정적 조력자가 된 셈이다.
2단계로, 같이 옥살이하던 사람 중 함께 탈옥할 이들을 골라 팀을 구성하고, 그중 재력이 있는 이에게 근대 화폐인 백동전 200냥을 가져오게 했다. 이 돈으로, 탈옥 당일 저녁, 80여 명의 죄수들에게 술판을 벌여 주었다. 당직 간수가 아편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간수에게는 미리 아편을 먹였다. 간수는 아편에 정신줄을 놓고 죄수들은 술에 취해 노래하니, 감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3단계인 탈출 경로도 흥미롭다. 삼릉창으로 바닥을 뚫어 감옥 밖으로 나가 담을 넘기 위한 줄사다리를 매어 놓았다. 혼자서 먼저 밖에 나와 잠시 갈등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혼자 갈 것인지, 약속한 이들과 같이 갈 것인지. 결론은 죽을 때까지 부끄럽게 살지 말자는 것. 나온 구멍으로 다시 돌아가 네 사람을 내보낸 뒤 자신은 맨 나중에 나왔다. 담을 넘을 때도 맨 뒤에 섰다. 그런데 앞사람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감리서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감시병들이 옥문을 열고 들어오는 와중에, 줄사다리를 오를 겨를도 없어 4미터가 넘는 담벼락을 한 길쯤 되는 몽둥이로 장대높이뛰기 하듯 넘었다. 다른 탈옥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혼자 남은 그는, 삼릉창을 들고 정문인 삼문으로 갔다.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 삼릉창으로 싸울 각오였으나, 비상상황에 불려가느라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걸어서 감리서를 나왔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동선을 추정할 수 있는 지명이 등장한다. 해변 모래밭, 감리서 뒤쪽 용동 마루터기, 천주교당의 뾰족집, 화개동 마루터기, 인천항 5리 밖, 인천서 시흥 가는 대로변, 벼리고개, 부평, 양화진 등이다. 밤새도록 해변 모래밭을 헤맸다고 했으니, 지금의 중구와 동구 쪽 바닷가를 왔다갔다 한 듯하다. 날이 샐 때가 되어서야
도심으로 길을 잡아, 서울 쪽으로 향했다. 이미 순검들이 쫙 깔렸다. 집 밖에 낸 아궁이에 숨기도 하고, 인천과 시흥 어름에서는 대로변에 심어진 어린 소나무의 포기 속으로 들어가, 해가 질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꼼짝 않고 죽은 듯이 버티기도 했다. 시골 방앗간에서 짚을 깔고 또 하룻밤을 보낸 뒤, 문전걸식하며 부평을 거쳐 서울 양화진에 당도했다. 그리고 이내 백범은 충청도, 전라도 등 삼남으로 길을 떠났다.
탈옥 뒤 백범은 김창수라는 이름을 바꾸게 된다. 구명을 위해 애쓰던 강화에 사는 유
완무가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그 김구이다. 백범 김구의 탄생은 그 정신과 이름 모든 면에서 인천과 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인천의 백범로는 대한민국의 근현대 역사를 질주하는 도로이기도 하다.
인생이 곧 현대사의 파노라마. 죽산 조봉암
2020년 1월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는 아주 특별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어록을 모은 책, 《죽산 조봉암 어록》을 펴낸 것이다. 600쪽 분량의 두툼한 책은, 인천광역시가 출판비용을 댄 비매품이었다. 시 예산으로 개인 어록을 출간할 만큼 죽산은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죽산 조봉암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6·25전쟁과 전후 복구 과정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나간 인물이자, 공작정치의 희생양이었다.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4년제 강화공립 보통학교와, 2년제 농업 보습학교를 다니고, 강화군청 급사로 취직, 면서기와 대서 보조원 등으로 5년 정도 근무했다. 강화에 3·1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9월 30일 출소했다. 독립운동을 향한 열의와 공부 열정을 떨치지 못한 그는, 스물두 살 되던 1920년 1월, 경성 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 그해 5월에는 대동단 사건으로 평양경찰서에 연행되어 2주간 조사를 받았다.
1921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엿장수를 하며 유학비용을 마련했던 그는, 11월 29일 박열, 김약수 등과 함께 재일 유학생 최초의 아나키스트 모임 ‘흑도회’를 조직했다. 볼셰비즘에 빠져들어, 주오대학 전문부 정치 경제과에 입학했다가 1922년에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갔다. 1923년 8월,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1924년 9월, 조선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결성해, 모스크바 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926년에는 상하이에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했다.
6·10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상하이 한인청년동맹을 조직하는 등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에서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신병이 넘겨졌다. 1933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939년 가석방으로 출옥, 인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45년 예비구금령으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8·15해방으로 풀려났다. 사흘 뒤인 8월 18일,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 1946년 2월, 인천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으나, 4개월여 뒤인 6월 23일 '비공산 정부를 세우자’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전향했다. 《3천만 동포에게 고함》, 《공산주의 모순 발견》 등의 소책자를 저술하고, 그해 8월 2일, 기자회견을 갖고 반공노선을 천명했다.
1948년 인천을구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의원으로 활동했고, 8월 2일, 초대 농림부장관에 지명되어 농지개혁법을 입안했다. 그가 기초한 농지개혁법은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토지균등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9년 2월, 농림부 장관직을 사임하고, 1950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천 병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재선의원으로 활약했다.
1952년과 1956년 대통령선거에 잇따라 출마해 차점자로 낙선했다.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대회를 열고 당위원장이 되었다. 60세가 되던 1958년 1월,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7월 2일, 1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는데, 그해 10월, 2심에서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결성하고 간첩행위를 했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사형이 집행되었고, 이틀 뒤 망우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죽산의 죽음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번째 사법살인으로 꼽힌다. 2006년 딸 조호정 등 가족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요청했고, 2007년 9월, 과거사위는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라'고 권유했다. 2008년 8월, 가족들이 대법원에 재심을 요청했고, 그해 광복절에 납북된 부인 김조이 여사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 합의부는 죽산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국가보안법과 간첩죄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52년 만이었다.
어느 한 사람의 인생이 이처럼 빠르게 장면이 바뀔 수 있을까.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을 그려낼 수가 있을까. 조봉암의 인생은 그 자체로 파노라마 같은 우리 현대사를 보여준다. 그를 큰 인물로 만든 것은 아마도 서대문형무소였을 것이다. 고문에 꺾이지 않고 잡초처럼 일어서 일생을 치열하게 살았다. 6·25전쟁에서, 남한의 농민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조봉암의 농지개혁 덕분이라는 점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그를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강제했다. 죽산에게 죄가 있었다면, 이승만과 대결한 것뿐이었다.
조봉암이 대단히 진보적이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실은 그의 제헌의원 시절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비판하는 대목을 보자. 1948년 6월 30일, 제1회 본회의 제21차 회의에서 조봉암이 '민주주의가 정말 방성대곡할 일'이라면서 발언한 내용의 일부이다.
‘총강에 특징적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표시와 인민을 일률적으로 '국민'이라는 어구로 표시한 점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했는데, 소위 민주공화국에 ‘대한’이란 대는 아랑곳이 없는 것입니다. 한이란 말이 꼭 필요하다면 '한국'도 좋고 우리말로 '한나라'라고 해도 좋을 것을, 큰 대 자를 넣은 것은 봉건적 자존비타심의 발성이요, 본질적으로는 사대주의 사상의 표현인 것뿐입니다.’
'대한민국'이란 말이 '대일본제국'과 무엇이 다르냐는 지적이다. 또 전 세계가 쓰는 '인
민'이란 말을 버리고 '국민'이라는 엉뚱한 말을 차용해서는 안 된다고 질타했다. '인민'을 공산당 측에서 쓴다는 이유로 기피해, 미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도 쓰는 말을 억지로 '국민'이라 바꾸는 것은 완고하고 고루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인천을 여행하면서 조봉암이란 인물을 떠올린다면, 대한민국의 '대'자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인민'과 '국민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 번쯤 고민해 보았으면 싶다. 조봉암은 1942년, 인천시 중구 도원동 12번지 부영주택으로 이사해 생활한 적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인천시에서 지은 시영주택이다. 경인전철 도원역 부근, 광성중고등학교로 오르는 언덕 오른편에 조봉암 가족이 살던 그 부영주택이 헐어질 듯 위태롭게 아직 남아 있다.
남북으로 갈라진 미술계의 최고봉. 김은호와 황영준
중국 베이징에는 '만수대 미술관'이라는 이름의 북한미술 전문 전시공간이 있다. 50대 초반의 중국인 미술관 대표는 오랫동안 북한의 미술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조선족이면서, 북한에 경제적 영향력이 큰 부모를 배경 삼아 스무 살이던 1988년부터 북한 사업에 뛰어든 그는, 경제 관련 사업으로 시작해, 점차 문화예술 분야로 외연을 넓혔다. 그의 미술관에는 북한 유명 작가의 작품이 수천 점 소장되어 있다. 몇몇 화가에 대해서는, 그림 인생 전반을 살필 수 있을 만큼 많은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만수대 미술관의 대표작가 중 화봉 황영준이 있다. 충남 논산 태생인 황영준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가로 불리는 이당 김은호의 제자다.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 등과 함께 이당을 사사했다.
황영준과 김은호를 이어주는 것이 인천이다. 인물화의 최고봉 이당은 인천 관교동에서 태어났다. 인천관립 일어학교에서 수학한 이당은 측량기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고서 베끼는 일을 하면서 빼어난 그림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묘사력이 뛰어난 그에게, 대표적 친일 세도가 송병준이 초상화를 맡겼다. 이후 고종과 순종의 초상을 제작하는 등, 당대 인물화의 대표작가로 부상했다.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이당은, 후진 양성에서 개인의 품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고 한다. 준엄한 이당의 예술관이 황영준의 그림 세계를 열어 젖혀준 것이다.
황영준은 1950년, 6·25전쟁이 나자, 북으로 건너간 월북작가다. 북에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을 정도로 작품 세계가 우뚝한 그의 활약상은, 만수대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월북하자마자 종군화가로 참여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금강산 그림도 많이 그렸는데,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2001년에는 《금강산 화책》이라는 화보집을 냈다. 화책 첫 장에는 이렇게 썼다. '자연과 생활에 대한 고상한 미는, 용암처럼 솟구치는 열정과 지향이 없이는 창조되지 않는다.'
황영준은 2002년, 남쪽에 두고 온 가족들과 상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황영준과 이당이 인천을 매개로 연결된다고는 하지만 이당은 친일, 황영준은 월북이라는 꼬리표가 있어, 가깝고도 먼 관계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2020년 1월, 마침내 인천에서 대규모 황영준 전시회가 열렸다. '봄은 온다'라는 타이틀을 달고, 한 달 넘게 열린 전시회에는 화봉의 작품 200여 점이 선보였다. 남한의 막냇동생과 막내 딸을 비롯한 가족들이 인천으로 달려와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인천은 유작으로 돌아온 황영준과 그의 가족을 연결시켜 준 상봉의 공간이 되었다. 남과 북의 두 거장 이당 김은호와, 화봉 황영준이 작품으로 인천에서 다시 만날 날이 왔으면 좋겠다.
가장 뛰어난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 이민창
20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다. 온 나라가 독립운동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호출했고, 그들은 역사 속에서 걸어 나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인천에는 우리가 잊고 있는 아주 특별한 독립운동가가 있다. 이민창. 1955년 발간된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은 그를 영웅으로 묘사한다. <인술에 여생 바치는 노투사 '이민창' 씨> 라는 글을 토대로 이민창의 독립운동과 수감 생활, 해방 후 활동 등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1941년이었다. '너희들이 합병 후, 30년이 지나면 독립을 준다고 했으니, 이제는 우리나라를 돌려보내라'는 내용의 벽보와 전단이 인천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조선총독과 일본 내각 대신들에게도 서한이 발송됐다. 병원을 운영하던 이민창이 혼자서 한 일이었다. 그는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자주독립의 필연성을 국제정세에 맞추어 연설했다. 청중들은 “미쳤다” “큰일 나겠다"고 말하며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이민창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 권오연이 담당했다. 그는 이민창을 고문했지만, 이민창은 굽히지 않고 목청을 돋워 취조하는 형사를 나무랐다.
“아무리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네놈이지만, 한국인의 피를 받았다면 내 주장이 그래 그르냐? 옳으냐?”
권오연은 해방 후, '노죄수의 굳고 곧고 깨끗하고 거룩했던 그 기개, 용기, 명석, 준엄에는 고개가 수그러졌다'고 고백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갈 때, 독립문에 이르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문의 유래를 연설했다. 지나던 행인들이 목례로 답했다.
이민창은 '가장 뛰어난 의사는 나라를 고치고, 그 다음이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약관의 나이에 한성병원부속학교에 입학해 강제병합 이전에 졸업, 서울에서 개업했다. 이화학당 출신을 부인으로 맞아 잘 살았으나, 1916년쯤 일제의 확정에 분개한 나머지 블라디 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고국을 잊지 못해 몇 년 뒤, 양강도 경흥과 황해도 재령에서 공의 생활을 했다. 인천에는 1929년쯤 정착했다. 이중설 병원 자리에서 시작한 병원은 10년 정도 운영했다.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은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옥중에서 조회때마다 불러야 했던 기미가요를 거부하고, 황국신민서도 일축했다. 형기가 더 늘어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4년여가 지나 1945년, 새해에 만기 출소일이 찾아왔다. 부인과 아들 딸, 가족들이 청주로 갔다. 이민창은 부인에게 말했다. "나는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가지 않고 감옥에서 죽을 테니, 어서 돌아가오. 집에 돌아간다고 해도, 일경들이 가족들을 못살게 굴 게 분명하니, 오히려 감옥에 있는 것이 가족들에게도 좋을 것이오."
만기를 넘기고 7~8개월 뒤인 해방이 되어서야 세상에 다시 나온 이민창은 어인 일인지,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웬 혁명가가 그리 많고, 애국자가 쏟아지고, 정치인이 범람하는 거냐는 이유였다. 정당인도, 지도자의 타이틀도 싫었던 그는, 그저 집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술을 펼치고, 과학을 공부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인천시내의 어떤 의사가 피란민 환자가 숨을 거두었는데 약값을 내지 않았다면서 사망진단서를 발급하지 않자, 격분한 이민창이, 앞장서서 사망진단서를 끊어 주었다. 환자들에게는 형편에 맞게 치료비와 약값을 받았다. 여유가 되면 받고, 그렇지 못하면 안 받고 치료해 주었다.
노투사 이민창에 대한 자료는 아직까지 《인천석금》을 넘어서는 것이 없다. 확인해 보니, 고일 선생의 기록은 대단히 정확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중, 이민창의 것에는 아주 특별한 대목이 있다. 연령, 즉 생년월일을 적는 곳에 '개국 495년 5월 11일’, 로 써 놓았다. 일본 연호를 거부하고 조선이 나라를 연, 1392년을 기준 삼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1886년생이다.
인물카드의 본적지는 '경기도 인천부 화정 165'로 되어 있다. 당시 화정은 지금의
중구 신흥동 지역이다. 하지만 이민창과 대단히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고일 선생은 이민창이 서울 태생이라고 했다. 인천으로 이주한 뒤, 본적지를 바꾼 것인지도 확인해 볼 일이다.
이민창은 1946년, 병원을 내과의 이중 씨에게 넘겨주고, 동구 화평동 오두막 초가에서
은거했다. 그 뒤의 행적은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 지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이민창, 이제는 그만 은거를 접고, 이 땅의 후배들에게 예전에 행했던 큰 뜻을 베풀어주도록, 전문가들의 탐구가 뒤따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천 인문여행 #7 경인아라뱃길은 자전거로 달려야 제맛
남북 분단으로 한강 하류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육지로 막혀 있던 서울과 인천 앞바다 사이를 뚫어 물길로 이은 것이 경인아라뱃길이다. 사람들은 경인운하라고 부른다. 여름철마다 홍수 피해를 겪던 부평 지역 굴포천 물을 서해로 흘러가게 하자는 방수로 사업이 1980년대 후반 추진되었는데, 경인운하 사업은 그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서 인천 서구 오류동을 연결하는 18킬로미터 물길은 2012년 5월, 개통되었다. 우리나라 첫 현대식 운하로 꼽히는 경인 아라뱃길은 수많은 논란 속에 추진되었으나, 그 목적에 비추어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아라여객터미널이 있는 곳이 정서진이다. 강원도 정동진의 대칭 개념으로 지어진 이름이니, 인천 입장에서 생각하면 기분 좋은 이름은 아니다. 조선시대 왕을 기준으로 좌·우 개념을 잡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경인아라뱃길은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환상의 코스를 제공한다. 물길을 따라 양편으로 곧장 쭉 뻗은 자전거길이 김포반도를 가로질러 이어지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이름하여 아라자전거길이다.
아라뱃길을 따라가다보면, 수변공간이 아름다워 가족소풍 장소로 제격인 시천가람터가 나오고, 뱃길 절벽 위에서 물길 안쪽으로 뻗치게 세운 전망대 아라마루도 만나게 된다. 아라마루는 까마득한 물길을 내려다보기에 아찔하면서도, 짜릿한 즐거움을 준다. 계양산까지 가면, 한여름 무더위를 싹 날려버릴 높이 45미터의 아라폭포에서 쏟아지는 거센 물줄기를 몸으로 만날 수 있고, 좀 더 가면 한국식 정원 수향원이 나타난다. 수향루라는 누각도 있는데, 그 생김새가 경복궁 경회루를 빼다박았다.
아라뱃길 주변에는 환경 관련 국가기관들이 여럿 들어서 있다. 그중에 국립생물 자원관이 특별히 볼 만하다. 한반도 자생생물과 희귀종 등 다양한 생물을 구경할 수 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생물 관련 기획 전시도 자주 마련한다. 수도권 매립지 드림파크에는, 야생화단지가 꾸며져 있다. 5월부터 10월까지 온갖 꽃들이 자태를 뽐낸다. 자연학습 관찰지구, 야생초화원, 습지관찰지구 등을 두루 구경하려면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
아라뱃길까지 왔다면, 청라국제도시 중앙호수공원을 찾는 것도 괜찮다. 자전거나 승용차로 이동해야 한다. 75미터까지 올라가는 초대형 음악분수가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공원이 어찌나 큰지 순환 산책로가 4.3 킬로미터나 된다.
인천 인문여행 #4 90년의 세월이 겹쳐지는 순간, 소래포구
소래포구에 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협궤용 증기기관차와 현대식 전철이 교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래 역사 전시관 앞마당에 놓인 증기기관차의 머리는, 새로 뚫린 수인선 철로를 향하고 있다. 수인선 전철이 오가는 시간에 맞추어, 이 증기기관차의 뒷부분에 서 있으면 그 교차점을 포착할 수 있다. 짧게는 40년, 길게는 90년의 세월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1927년 제작된 이 증기기관차는 1937년 8월부터 수원역~남인천역 간 52킬로미터의 수인선을 달렸다. 디젤기관차가 나온 1978년 여름까지 운행했고, 수인선은 1995년 12월 31일 멈췄다. 이 증기기관차는 한때 대관령 휴게소에 전시되어 있다가, 2008년 7월 소래역과 가까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소래 역사전시관은 소래포구 주변을 둘러보기 위한 사전답사지라고 할 수 있다. 포구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 변천과, 수인선에 얽힌 애환, 소래염전에서 소금 내던 이야기 등 다양한 내용을 미리 훑어볼 수 있게 꾸며 놓았다. 소래포구에 왔다면 소래철교를 꼭 건너볼 필요가 있다. 인천 남동구 소래포구와 경기도 시흥시 월곶을 연결하는 소래철교는 옛 수인선 열차가 다니던 철로다. 수인선 운행이 중단되면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철길이 되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철교 위를 처음 올라선 이라면 약간의 무서움에, 오금이 저리는 느낌과 짜릿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철교 바로 옆에는 19세기 후반, 외국 선박을 막기 위해 설치한 장도포대지도 보존되어 있다. 예전에는 포가 3기나 있었다고 한다.
소래포구 증기기관차와 전철, 소래 어시장은 팔딱팔딱 숨을 쉰다. 생물이건 건어물이건, 대부분 수산물을 좌판에 내놓고 판다. 배가 들어오는 현장에 있는 어시장이니 당연히 손님들은 물건에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다. 참으로 살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아, 여행자의 주머니는 자꾸 가벼워지고 보따리는 이것저것 늘어난다.
소래습지 생태공원은 포구에서 살짝 떨어져 있다.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먼저 자전거 빌려주는 곳이 눈에 띄고, 주차장은 넓다. 생태공원 입구에는 다리가 하나 있다. 소염교, 이름처럼 소래염전으로 가는 다리다. 생태공원은 예전에 염전이었다. 이곳에 처음 다리가 생긴 건 1933년, 이듬해에 소래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을 소래역까지 운반하기 위한 철로가 이 다리에 부설되었다고 한다. 염전은 1996년 문을 닫았지만, 다리는 몇 차례 변신을 거쳐 살아남았다.
소래습지 생태공원은 아파트단지가 가득한 도심 속 허파라고 할 만하다. 갯골로 바닷물이 드나드는 것도 지켜볼 수 있고, 나문재 같은 염생식물도 드넓게 펼쳐져 있다. 괭이갈매기, 흰뺨 검둥오리, 저어새, 개개비, 방울새, 붉은발도요 등 그 이름도 낯선 새들을 철따라 만날 수 있다. 포구와 갯골, 나문재 밭을 거쳐 오는 바람은 얼마나 짭조름한지. 생태전시관, 전망대, 해수 족욕장, 갯벌 체험장, 염전 관찰데크, 탐조대, 쉼터 등 시설이 다양하다. 관람용 염전에 가면 토판, 옹패판, 타일판등 결정지 바닥의 변천과, 염전에서 쓰던 온갖 기구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살필 수 있다.
이곳은 특히 자전거 코스로 이름이 높다. 자전거를 타고 8킬로미터 떨어진 인천 대공원까지 다녀오는 것도 추천코스다. 인천 대공원에도 볼거리가 많다. 동물원과 수목원, 목재 체험관, 반려동물 놀이터까지 갖춰 놓았다. 백범광장에 들러 아들 백범과, 그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을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다.
인천 인문여행 #3 인천의 친수공간, 월미도
인천역에서 걸어 20~30분이면 월미도 선착장에 닿는다. 인천역과 월미도를 왕복하는 작은 모노레일 열차도 다닌다. 오가는 길 한 번은 열차를 타고 다녀와도 재미있다.
인천역에서 월미도 가는 길로 10분을 채 못가서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 꺾으면 월미도, 곧장 가면 북성포구, 오른쪽은 만석고가 밑 철길이다. 그 삼거리 북성포구 입구에 인천 상륙작전 기념비가 서 있다. 인천상륙작전 기념비는 3개가 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만조 시간에 맞추어, 미 해병대는 3개 팀으로 나누어 상륙작전을 펼쳤다. 제5연대 1대대와 2대대는 레드비치를, 5연대 3대대는 그린비치를, 제1연대는 블루비치를 상륙지점으로 잡았다. 이 작전에는 우리 해병대원들도 참여했다.
기념비가 있는 삼거리에서 곧장 가는 좁은 골목길을 5분 정도 걸으면, 북성포구가 나온다. 공장 지대에 둘러싸인 북성포구는 아슬아슬하게도 물길이 막히지 않았다. 노을이 질 때, 북성포구에 간 여행자라면, 누구나 사진작가가 된다. 포장마차 같은 식당가도 작게 형성되어 만조 때면 찰랑거리는 바닷물 위에서 음식을 먹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한다.
한국 이민사박물관은 인천 해사고등학교 건너편에 있다. 월미공원 정문에서 왼쪽 도로를 따라 20~30분 걸어야 한다. 바다열차를 타면 쉽게 갈 수 있다.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이민선이 미국 하와이를 향해 출발한 장소다. 그 장소에, 우리 이민의 역사를 한데 모아 전시해 놓았다.
월미도를 찾는 이들이 꼭 들르는 문화의 거리는 월미도 친수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와 놀이시설이 어우러져, 혼자서 가도 어색하지 않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월미산 산책길은 오르기에 어렵지 않다. 꼭대기 전망대에서는 시원스럽게 펼쳐진 월미도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월미산이 9.15 상륙작전 때, 산 높이가 낮아질 정도로 심하게 폭격을 당했다고 한다. 그때,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무들 중 몇 그루는 아직도 몸에 포탄 파편을 품고 있다. 인천시는 이들 나무를 '평화의 나무'라 이름 지어 관리하고 있는데, 산책로를 걷다보면 만날 수 있다. 월미공원 전통정원 인근 마을 사람 100여 명도 상륙작전 때 미군의 네이팜탄과 기총소사로 희생되었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분들의 명복을 빌어 드리자.
도둑이 끊이지 않던 귀한 약재 강화인삼
한국 인삼은 세계적인 장수식품, 건강식품으로 꼽힌다. 인삼의 학명인 '파낙스 진생 '의 파낙스는 만병을 다스리는 약이라는 뜻이다. 인삼의 효능이 만병통치약 수준으로 좋다는 얘기다.
강화도에는 인삼 센터가 몇 곳 있다. 외지인들이 찾기 쉽도록 강화대교나 초지대교 입구, 버스터미널 근처에서 특산물인 강화인삼을 판다. 판매센터는 각각의 인삼조합이 별도로 관리한다. 규모가 큰 인삼조합에는 400명 가까운 조합원이 가입되어 있다. 강화도 사는 함민복 시인도, 강화대교 입구에서 인삼 장사를 한다.
강화도 인삼이 유명해진 것은 개성인삼 덕분이다. 강화도에서 언제부터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1900년대 초반 개성에서 인삼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강화도의 인삼 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6·25전쟁때, 강화로 피란 온 개성 사람들이 인삼 농사에 합류하면서, 인삼밭이 급격히 늘었다.
1970년대, 전국의 인삼 경작 면적을 비교해 보면, 강화도는 홍삼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백삼은 금산에 이어 2위였다. 1980년 발행된 《지리학》 제22호에 실린 논문 자료를 근거로 한 내용이다. 해방 후, 국내 첫 문화원 잡지로 1948년 창간된 《강화》에 실린 당시 강화군청 공무원의 기고문을 보면, 해방 후 전쟁 전까지는 강화의 인삼 재배 면적이 많지 않았다. 보리가 가장 많았고, 채소, 감자, 과일 등이 뒤를 이어, 인삼은 밭벼에도 미치지 못했다.
개성 인삼의 시작점도 명쾌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다. 연구자들은 경상도 산간이나 전라도에서 시작되어, 개성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개성의 향토사학자 송경록이 지은 《개성 이야기》에서조차, '오랜 옛날부터 인삼을 재배했다'고만 언급한다. 개성 인삼의 시초를 실감나게 그린 장면은 소설에서 볼 수 있다. 황석영의 《장길산》이다. 전라도 화순에 살던 모녀가 산삼 재배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찌어찌하여 개성으로 흘러들었지만 죽을 지경으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에게 개성상인 박대근이 다가갔다. 장길산의 후원자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이다. 개성의 자본과 전라도 산삼 재배기술이 만나, 개성 인삼이 되었다는 게 우리나라 최대 이야기꾼으로 꼽히는 황석영의 풀이이다.
개성의 인삼 재배방식은 어떠했을까. 강화에 사는 개성 출신 인삼 재배 노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삼밭에 거름을 주고, 삼을 심고, 종삼을 키우는 일이 만만치 않다. 4~5년근에서 씨앗을 채취해 종삼을 만들고, 그걸 깨끗한 모래에 섞어 아침저녁으로 100일 동안 물을 주어야 한다. 종삼을 옮겨심기 전에 삼포에 거름 주는 일도 보통 정성이 아니다. 좋은 거름은 구벽토, 구재, 가답 세 가지를 섞어야 한다. 오래된 집터나 벽에 붙은 흙이 구벽토고, 솥이나 굴뚝, 방고래 같은 곳에 쌓인 검댕이 구재다. 낙엽이나 콩 썩은 것이 가답이다. 요즘은 이름도 낯선 이런 것들을 구해, 거름을 만들어 삼밭에 내야 했다. 지금 강화에는 개성 전통방식에 따라 인삼농사를 짓는 사람이 거의 없다. 80대 후반 노인들만이 겨우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해방 직후 강화 인삼조합은 정부에 전매국 지정구역으로 편입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전매국 산하로 들어가면 수매제도가 있어서인지, 인삼 판매에서 여러 가지로 편리한 측면이 많았던 모양이다. 1946년 10월, 정부는 강화 인삼조합을 개성 관내로 편입시켰다. 개성 인삼과 강화 인삼이 아예 한 몸이 되어버린 거였다.
전매국에서 수매한 인삼도, 주민들이 일일히 껍질을 벗기고 다듬어야 했다. 그것도 고된 노동이었다. 그 인삼 껍질 깎는 장면은 개성 출신 소설가 박완서의 산문집 《두부》에 실린 '개성사람 이야기' 속에 생생히 드러나 있다.
‘송도시내에 사는 여자들이라고, 다들 장롱 걸레질, 솥뚜껑 행주질만 하고 산 것은 아니다. 그들도 기회만 있으면 체면 가리지 않고, 경제활동에 나섰다. 수매한 인삼 백삼으로 만들려면, 껍질을 벗겨야 한다. 그때가 가정부인들이 빈부나 지체를 가리지 않고, 부엌에 나서는 때이다. 조합 너른 마당에 큰 맷방석에다 인삼을 산처럼 쌓아놓고, 여자들이 둘러앉아, 대나무칼로 인삼 껍질을 벗긴다. 한 맷방석에 아홉 명, 열 명, 혹은 열한 명씩 둘러앉는다. 열심히 손도 놀리고 입도 놀리며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면, 대개 오전 중에 끝난다. 작업이 끝나는 대로 임금이 지불된다.’
인삼 껍질 벗길 때 가장 힘든 것은 얽힌 뿌리를 다듬는 일이다. 뿌리가 ‘사람 인’ 자 모양으로 곧게 뻗어 있으면 좋지만, 서로 얽혀 있는 '악바리'는 작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고집 세고 모진 사람을 일컫는 악바리란 말이 인삼 껍질 벗기는 작업에서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매국을 통하지 않는 밀매도 성행했다. 인삼 밀거래는 오래된 얘기여서, 조선 말기에는 인삼 밀매범을 효수에 처할 정도로 엄하게 다루었다. 1930년대에도 밀매범 단속이 심했다. 1933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는, '홍삼 밀매범 인천에서 검거'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강화에 사는 사람이 홍삼 35개를 갖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려다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는 강화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강화 나루에서 중구나 동구쪽 부두를 오가는 여객선을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는 인천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값비싼 물건이라, 인삼 도둑도 많았다. 강화도에서 4년근이 지나면, 삼포마다 관리자를 내세워 야간 순찰을 돌았지만, 도둑을 막지는 못했다.
인천 인문여행 #2 개항장으로의 시간 여행 2
개항 당시, 차이나타운과 일본인 거리를 구분하기 위해 세운 상징물이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이다. 자유공원 남쪽 자락, 급경사를 이루는 곳에 있고, 요즘은 청일조계지 쉼터라고도 부른다. 계단 양편에 늘어선 석등을 일본 쪽은 일본식, 차이나타운쪽은 중국식으로 깎았다.
제물포구락부에 들러 자유공원으로 올라가 본다. 제물포구락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일본 등 개항 당시 인천에 진출해 있던 해외 각국의 인사들이 사교 모임을 갖던 개항장의 외교클럽이었다. 각국 스파이들이 펼치는 정보전쟁의 핵심 공간이었을 게 분명하다. 6·25전쟁 이후에는 인천시립박물관, 인천문화원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에서는 인천항과 월미도를 내려다볼 수 있다. 이곳의 상징물과 같은, 사방에서 뾰족한 꼭짓점들이 한데 모인 형상의 한미수교 100주년기념탑과, 맥아더 장군 동상도 만날 수 있다.
자유공원에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인 제물포고등학교 후문 쪽에는 인천 기상대가 자리하고 있다. 1904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기상관측을 시작한 인천관측소는 1905년, 현 위치로 이전했고, 국내 13개 지역의 지방 관측소와 만주 지역의 여러 관측소를 통괄했다. 해방 이후 중앙 기상대 역할을 수행하다가 1953년, 중앙 기상대가 서울로 옮겨가면서 다시 인천 관측소로 기능이 축소되었다. 1992년에는 인천 기상대로 이름을 고쳤고, 2013년 건물을 신축했다.
인천 기상대에는 1923년 지어, 창고로 사용하던 건물이 지금도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외벽에는 6·25전쟁 중, 교전 흔적인 총탄 자국이 선명하다. 창고건물 옆에는 우리가 어릴 적, 학교에서 신기하게 보았던 새하얀 상자, 백엽상이 있다. 지진, 지면온도, 습도, 강우량, 기온, 일조량, 자외선, 낙뢰 등을 측정하는 곳으로,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기온이 떨어졌을 때, 얼음 어느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통도 놓여 있다.
동인천역 쪽으로 내려가면 금방 홍예문에 다다른다. 홍예문은 이름 그대로 위쪽이 무
지개처럼 둥그렇게 굽어 있는 모습이다. 사람과 차량의 왕래를 위해 1905년, 착공해 1908년 완공했다.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은 이 홍예문을 건설하기 위해 '고갯길 뚫기 위원회'까지 꾸려, 공사 대금을 마련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홍예문에서 10분 거리에 김구 선생이 옥살이를 했던 인천감리서 터가 있다. 작은 아파트와 단독주택, 상가들이 뒤섞인 지역에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인천 중구청은 이곳을 포함한 '역사순례길'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시 10분 거리에는 답동성당이 있다. 백범이 탈옥한 뒤, 밤을 새워 길을 헤맨 끝에 새벽이 지나서야 보았다던 '천주교당의 뾰죽집', 바로 그 성당이다. 1897년 지어진 답동성당은 우리나라의 서양식 건물로 된 가장 오래된 성당 중 하나다. 1981년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의 동상. 김구 이야기 2
인천에서 경기도 시흥, 부천으로 넘어가는 경계지점에 인천대공원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인천시민은 물론이고, 부천과 시흥 주민들도 많이 이용한다. 야트막한 산 속에 시설물이 많지 않으면서 숲길이 좋다. 그 공원 한쪽 구석에 백범광장이 있다. 김구 선생과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을 세워 놓은 곳이다. 인천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백범로의 동쪽 끝자락이기도 하다.
서울 남산 백범광장에 우뚝 선 백범 동상은 많이 알고 있지만, 인천에도 백범 동상이, 그것도 어머니 동상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이곳은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백범이 인천에서 2년 가까이 1차 옥살이를 할 때, 그의 부모는 백방으로 구명운동에 나서고, 헌신적인 옥바라지를 했다. 여러 인천 사람들이 백범을 위해 나서준 것은, 그 부모의 애틋한 자식사랑에 감명 받은 부분도 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2019년의 4월,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을 찾았다. 벚꽃이 흩날리며, 비처럼 내리는 산책로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약간 외진 백범광장은 찾는 이가 거의 없었다. 백범의 동상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게 되지만, 그 옆에 초라하게 서 있는 어머니 동상은 설명을 읽기 전에는 누구를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곽낙원 여사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머리를 땋아 위로 묶은 것이며, 허름한 치마저고리이며, 가녀린 얼굴 생김새와 작은 키, 왜소한 몸매까지, 옥바라지 할 때 그 모습 그대로 백범의 눈으로 재현했다. 오른손에 든 바가지는 동냥을 다니면서까지 아들을 옥바라지한 어머니를 형상화했다. 발에는 짚신을 신고 있다. 그 짚신 바로 아래 1949년 8월에 동상을 완성했음을 알리는 숫자와, 한자로 '박' 이라 쓴 작가의 서명이 보인다.
동상은 박승구의 작품이다. 백범은 경기상업학교, 경기중학교 미술교사를 지낸 조각가 박승구에게 어머니 동상을 맡겼지만, 작품은 백범이 안두희의 흉탄에 스러진 2개월 뒤에 완성되어, 정작 자신은 완성품을 보지 못했다. 작가는 백범의 장례를 치른 뒤, 어머니 동상을 완성하기까지 2개월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박승구는 경기도 수원 출생이다. 1944년 일본 도쿄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교사와 작품 활동을 병행했으며, 1949년 가을에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조각부에서 <성 관음상>으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6·25전쟁 때 월북해, 조선 미술가동맹 조각분과 지도원과, 공예분과 위원장을 역임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 동상은 '백범 김구선생 동상건립 인천시민 추진위원회', '인천광역시’ '사단법인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등 3개 기관 단체의 이름으로, 1997년 10월 15일, 세워졌다. 시민 추진위원회 위원장은 마지막 송상으로 불리던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회장이 맡았고, 당시 시장은 YS계의 핵심 최기선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되었다. 동상 건립비용을 낸 개인은 이회림 회장을 포함해 33명이었고, 여러 기업체와 기관에서 동참했다. 김우중 회장의 대우 중공업과 인천 경기 지역의 향토은행 경기은행도 참여했다. 대우 중공업은 두산 인프라코어로 바뀌었으며, 경기은행은 IMF 외환위기 당시 퇴출 대상에 올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열 두곳이나 되는 인천지역 상호신용금고도 보탰는데, 이들 역시 지금은 낯선 존재가 되었다. 동상은 장소와 시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다. 신산했던 백범의 삶과 함께, 우리 근현대사의 단면, 역사 속으로 스러진 인물들을 만나는 소중한 단서가 되어준다.
그렇다면 백범의 아버지는 어떤 인물일까. 아버지 김순영도 탈옥한 아들 대신, 옥살이를 하는 등 모진 고초를 겪었다. 외아들이 인천 감옥에 갇히자, 부모는 해주의 집 문을 닫아걸고, 인천으로 옮겨와 살았다. 모친은 날품을 팔아 옥바라지를 했고, 부친은 강화와 서울을 오가며 석방의 길을 찾았다. 서울에서 소송을 했지만, 결과가 없자 소송 문건을 챙겨 강화의 문장가 이건창을 찾아가 방책을 물었다. 탈옥 직전 '인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시라고 당부한 백범의 말을 따라, 부모는 해주로 돌아갔지만 뒤따라 온 인천 순경에게 붙잡혀 인천 감옥에 갇혔다. 모친은 곧 석방되었지만 부친은 고문 속에 1년 정도 징역살이를 하고 1899년 3월, 석방되었다. 백범은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청량산 자락의 인천시립박물관이나,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둘러보았다면, 내친김에 가볼 곳이 있다. 가천박물관이다. 소장 유물의 폭과 깊이를 보았을 때 어느 박물관보다 귀한 시간과 가치를 품고 있는 곳이다. 시립박물관 주차장 옆 도로에서 흥륜사 방면으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된다. 주변이 고급 주택가여서 이런 곳에 박물관이 있을까 싶은 자리다.
가천박물관에는 인천 유일의 국보가 있다. 인천을 잘 안다는 사람 중에도 이 사실은 처음 듣는다는 이들이 많다. 주인공은 국보 제276호로 지정된 《초조본유가사지론 권 제53》이다. '유가사지론'은 법상종 승려들이 공부하던 대표적 불교 경전 중 하나다. 당나라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와 번역했다고 한다. 고려 현종때, 초조대장경을 만들면서 판각해 인출한 것이다. 가천박물관 소장품은 전체 100권 중 53권에 해당하는데, 각필로 눌러 쓴 석독구결이 발견되었다. 석독구결은 한문을 우리말로 읽기 위한 표시다. 각필은 색깔이 있는 것으로 눈에 띄게 쓴 게 아니라 뾰족한 나무나 뿔 같은 것으로 잘 보이지 않게 눌러 썼다는 얘기다. 초조대장경은 고려의 불교적 역량과 목판 인쇄술의 발전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원판은 몽골 침략 때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 인쇄본도 남아 있는 게 많지 않다.
가천박물관에는 국보 이외에도 보물 14건,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3건 등 총 19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길병원과 한 식구여서 그런지 의료사 자료가 유난히 많다. 보물 제1178호 《향약제생집성방 권 6》 등 8점의 의료 관련 보물을 갖고 있다. 의료 생활사 자료만 3500여 점이니 가히 국내 최대 의료 생활사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900여 점의 의서를 포함한 고서도 1만1200여 권이나 소장하고 있다. 채약도구, 정리도구, 약연, 약장, 약 도량형, 침구 등 우리 조상들이 질병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보여주는 당시 물건들도 눈길을 끈다. 약재를 갈 때 쓰던 약연이나, 약을 빻아 가루로 만드는 데 쓰는 약절구, 유발, 약탕기는 예술작품처럼 멋진 모습을 하고 있다.
가천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잡지 발행의 역사도 꿈틀댄다. 신문과 잡지 창간호 2만 200여점을 갖춘 창간호 소장 박물관으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일본 도쿄에서 조직된 영남지역 유학생 단체, '낙동 친목회'가 신교육 보급과 자주독립 사상 고취를 목적으로 발간한 《낙동 친목회학보》, 우리나라 근대 잡지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최남선의 《소년》, 최초의 교육학습지 《장학보》, 호남지역 교육과 주권수호운동을 펼치기 위해 조직된 호남학회의 기관지 《호남학회월보》,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을 기반으로 결성된 기호흥학회에서 발행한 애국계몽잡지 《기호흥학회월보》 등은 각 분야에서 앞서 나간 인물들이 잡지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보여준다.
최남선이 주도한 아동잡지로 순 한글이었던 《아이들보이》도 있다. '보이는 소년을 뜻하는 'boy'가 아니라, 읽을거리를 뜻한다고 한다. 의료 관련 잡지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의학 학술지 《한방의학계》는 서구 문물과 의술이 밀고 들어오던 시기에 한의학계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준다.
검찰이나 경찰 등 수사기관의 수사 과정에서 무척 중요한 판단 근거를 제공하는 게 법의학이다. 18~19세기 조선시대 법의학 수준을 가늠케 하는 자료도 가천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1792년과 1796년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증수무원록》이다. 제목 그대로 '억울함을 없게 하라'는 왕명에 의해 만들어진 법의학서다. 사체의 시간대별 변화부터 사인 규명방법까지, 감정에 필요한 각종 사항과 절차를 담았다.
1845년, 충남 아산지역에서 발생한 이소사 여인의 변사 사건 <검시형도>도 있다. 시신의 앞면 54부위와 뒷면 26부위 등 총 80여 곳의 상태를 자세히 기록했다. 밭에나가, 김을 매고 있던 이소사가 동네에서 양반 행세를 하고 다니던 허삼손이라는 자에게 겁탈당하고 자살했다. 수사기관은 검시형도를 기초로 검시와 문초를 반복한 결과, 사건을 해결했다. 허삼손은 '겁탈과 위협과 핍박으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는 참한다'는 대명률 조항에 따라, 참수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증수무원록》과 <검시형도>는 하나의 세트로 봐야 한다.
가천박물관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약전'이라는 현판도 있다. 추사는 19세기 동북아시아 최고의 예술가로, 중국과 일본의 문화인들 마음을 사로잡았던 최초의 한류스타라고 할 수 있다.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양각으로 새기고 파란색 안료를 칠했다. 어디에 걸려 있던 현판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약재를 취급하던 의약 관련 기관의 건물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앞뜰에는 아주 특별한 종 3구가 나란히 서 있다. 우리가 사찰에서 흔히 보는 부드러운 스타일이 아니라 어딘지 딱딱한 느낌을 주는 이 종은 중국에서 건너온 것들이다. 시립박물관은 도시가 지나온 이력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이 종들이 건네는 이야기는 특별하다.
연수구 옥련동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위에 자리 잡은 인천시립박물관은 해방 이후 지방 정부가 처음 만든 박물관이다. 애초의 위치는 이곳이 아니었다. 1946년 4월 1일 중구 만국공원의 인천향토관을 개조해 개관했다. 초대 관장은 우리나라 미술평론 분야를 개척한 이경성 선생이다. 이 관장의 자서전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에 박물관 개관 당시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경성 관장은 1945년 10월 31일 박물관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5개월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국내 첫 시립미술관을 개관했다. 개관식은 오전 10시 박물관 회랑에서 열렸다. 내빈으로 참석한 인사는 임홍재 인천시장, 길영희 인천중학교 교장, 황광수 인천시교육감, 미군정장관 스틸만 중령, 미군정 교육담당관 홈펠 중위, 그리고 인천의 유지들이었다. 길영희 교장이 교육감 앞에 놓였다는 점으로 당시 인천에서 길 교장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미군정에서 참석한 인사들도, 시립박물관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며 박물관에 관심을 갖게 된 이경성 관장은 개성부립 박물관장으로 있던 우현 고유섭 선생과 편지로 교유하면서 박물관 관련 분야에 대해 배웠고, 해방 때까지 그 관심을 놓지 않고 있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미군정청 교화국장 최승만을 찾아갔고, 처음 만난 최 국장은 그 자리에서 국립중앙박물관 김재원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모처럼 기특한 젊은이가 생겼다." 며 소개했다. 그때는 국립중앙박물관도 정식 개관을 하기 전이라 달리 할 일도 없이 열흘 쯤 서울의 사무실로 출근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인천 미군정청에 근무하는 홈펠 중위가 찾아왔다. 그는 인천 향토관 건물을 임대해 박물관을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했다.
‘1945년 10월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인천으로 돌아온 나는 임홍재 시장을 만나고 향토관을 두루 살핀 후, 그것을 시립박물관으로 만들 결심을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1945년 10월 31일. 인천시장실에서 미군정관과 시 간부들이 있는 가운데 인천시립박물관장 발령을 받았다. 대우는 촉탁이고 월급은 300원이었다. 우선, 개관 날짜를 만국공원 주변에 꽃이 만발하는 4월 1일로 정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국내 첫 시립박물관, 그 첫 박물관장은 이렇게 태어났다. 미군의 아이디어로 시작해 1개월여 만에 예산도 한 푼 없이 관장부터 발령을 냈다. 이경성 관장은 건물 수리부터 했다. 홈펠 중위와 직접 지프를 타고 다니면서 인천기계제작소 등, 여러 공장들에서 재료를 조달했다. 향토관은 독일인들이 조선 말기에 지은 세창양행 사택이었다. 건물 외관을 장식하는 12개의 아치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건물 보수 이후에는 소장품 수집이 문제였다. 일본인들이 향토관으로 쓸 때 갖고 있던 선사유적이나, 개화기 유물 또는 사진들이 일부 있었고, 국립중앙박물관 김재원 관장을 졸라서 문화재급 작품 19점도 빌려왔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도 60점의 민속품을 빌렸다. 이들이 유물을 빌려준 이유는, 인천시립박물관을 국립민속박물관 분관으로 삼으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관 설치에 따르는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이 안은 성사되지 못했다. 인천 세관창고에는 물러가는 일본인들의 물건이 몰수되어 쌓여 있었는데, 이경성 관장은 그 창고를 1개월 정도 출입하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왔다. 이 또한 미군정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게다. 어떤 수집가로부터 골동품을 기증받기도 했다. 이 관장은, 소장품 수집의 여섯 번째 일로, 중국 종을 찾게 된 이야기를 소개했다.
‘하루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렀더니 김재원 관장이 인천부평 조병창에 일본 사람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중국 각지에서 빼앗아 온 철물들이 있다는데 보았느냐는 것이다. 사실은 금시초문이었지만, 아는 척하고 돌아와서 그 다음 날로 홈펠 중위와 함께 조병창에 가서 알아본즉, 많은 종과 불상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을 몇 가지 골라 달라고 하여, 미군 트럭에 싣고, 송학동 박물관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때 가져온 3구의 중국 종이, 지금 인천시립박물관 앞에 그럴듯하게 자세를 잡고 서 있는 것들이다. 원나라 때 범종과,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송나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범종, 그리고 명나라 때 범종이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작은 명나라 범종이 맘에 든다. 덩치 큰 원나라와 송나라 것에는 공통적으로 '황제만세 중신천추'라는 글귀가 새겨 있다. 황제와 주요 대신들의 만수무강을 비는 내용이다. 그러나 명나라 종에는, '풍조우순 국태민안' 이라고 썼다. 비바람이 적당하기를 빌고 국민들의 삶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앞에 인용한 예문 중에 '많은 종과 불상들이 있었는데 몇 가지 눈에 띄는 것만 골라서 가져왔다.'고 했다. 그 많던 조병창의 불상과 종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선 확인할 수 있는 곳은 강화 전등사다. 여기에도 시립박물관에 있는 것들과 겉모양이 비슷한 중려온 중국 종들은 국 종이 하나 있다. 제작 연대는 북송 시대인, 1097년이라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등사도 일제강점기에 원래 있던 종을 빼앗겼는데, 해방이 되자마자 주지스님이 부평조병창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전등사 종은 이미 녹여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어 옛 종과 가장 비슷한 것으로 골라 싣고 왔다고 한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까지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확대했다. 그 군수기지로 인천조병창을 세웠고, 한반도와 중국 지역의 민가는 물론 산속까지 뒤져 쇠붙이라는 쇠붙이는 모조리 공출해 왔다. 녹여서 무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때 끌1945년 8월 일본의 패배로 목숨을 건져 옛 이야기를 속울음으로 들려주고 있다.
인천에는 포구가 여럿 있다. 강화군이나 옹진군 같은 섬지역은 물론이고 남동구나 중구, 동구 등 도심 지역에도 포구가 있다. 남동구 소래포구는 수도권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자 어시장이다. 송도경제자유구역과 경기도 시흥의 배곧신도시, 마천루 같은 아파트가 빼곡한 그 틈을 비집고 배가 드나드는 포구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저 너른 갯벌과 바다였을 뿐이다.
소래포구는 인천과 경기도 시흥을 경계 짓는 아주 깊은 갯골이다. 드나드는 물살이 얼마나 거센지 예전에는 동력선이 아닌 어선들은 물때에 맞추어야만 포구를 드나들 수 있었다. 갯골 수로의 낭만적 풍경과 함께 어선과 어시장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소래포구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요인이다.
소래, 그 이름이 참 묘하다. 한자로 보면, 소는 되살아난다는 뜻이고 래는 나물로 유명한 명아주를 일컫는다. 이 둘을 합쳐 놓으니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소래가 들어간 이름은 또 있다. 소래포구와 멀지 않은 곳에 소래산이 있다. 인천대공원과 맞닿아 있으며, 인천과 경기도 시흥의 경계 지점에 있다. 소래포구와 소래산의 이름은 소정방이 왔던 곳 이라는 의미에서 원래는 '소래蘇來’ 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소래蘇萊’로 변했다고 한다.
《인천지명고》에서 소래산을 설명한 대목을 보자.
‘소래산의 한자 표기는 소래(蘇來)였는데 근래에 들어 소래(蘇萊)가 되었다. 신라시대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이곳에 왔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이훈익은 소래포구의 지명 유래도 소래산과 같다고 했다. 소래포구와 소래산은 소정방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인천 앞바다 덕적도에 바짝 붙어 있는 소야도가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소야도의 이름 역시 소정방과 관련이 있다. 660년 당나라군이 백제를 치기 위해 한반도에 왔을 때 덕적도 일대에 상륙해 소야도에 머물렀던 듯하다.
《삼국사기》는 당나라 소정방 군대가 중국을 출발, 인천 덕적도에 도착해 신라군과 합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정방이 당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한 첫 코스가 중국 산둥반도에서 인천 덕적도에 이르는 항로였다는 설명이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 초기 모습도 위와 비슷하다.
신라의 파병 요청을 받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하기 위해 한반도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인천 앞바다였다. 그 덕적군도에 포함된 섬 소야도는 '소정방 섬'이라는 뜻의 이름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 민초들은 그 옛날부터 역사적 사실을 지명 짓기 등의 방식으로 남김으로써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했다.
소야도와 소래포구, 소래산, 인천 앞바다에서 포구를 거쳐 내륙으로 이르는 루트처럼 가지런한 느낌이다. 여기서 생각할 게 하나 있다. 나당 연합군과 백제군 사이에 펼쳐진 정보전 가능성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듯 신라군과 당나라군은 덕적도에서 백제 공격 작전을 짰다. 신라군도 병선을 동원했다. 당나라군과 함께 서해안선을 따라 내려가 기벌포(금강 하구)를 거쳐 백제로 직접 침투할 수도 있고, 당나라군이 인천 해안에 상륙해 신라군과 함께 육로로 진입하는 방안도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군은 금강으로 배를 타고 갔으며 신라군은 육로를 택했다. 백제군은 양쪽으로 방어 병력을 나누어야 했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육·해 병진 작전은 자연스럽게 백제군의 전력 분산을 유도해 백제군을 무너뜨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 작전을 결정하기 위해 소정방이 직접 소래포구를 거쳐 소래산까지 올랐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소정방은 덕적도에서 이미 금강을 향해 바다로 떠났는데, 마치 소정방이 소래포구를 거쳐 소래산으로 이동한 것처럼 허위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다. 아무튼 당시 나당 연합군의 작전은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어물전과 포구를 구경하기 위해 들른 소래포구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 군대가 이 땅에 몰려들었던 백제 멸망 시기인 서기 660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영종도 동북방, 월미도 서북방 바다 위에 작은 섬 하나가 떠있다. 작약꽃 같이 생겼다 하여 작약도다. 원래 이름은 물치도 또는 무치도였다 고 한다. 이를 일제강점기에 작약도라 고쳐 불렀다. 행정구역으로는 동구 만석동에 속해 있으며, 공유수면과 육지면적을 합쳐 총 12만 2538제곱미터 규모다. 작약도를 오가는 배편은 2012년 1월에 끊겼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예전에는 인천의 이름난 관광지였다.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인천 앞바다를 거쳐 한강으로 가기 위해서는 작약도를 지나야 했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나 미국의 군함들도 이 작약도에 정박해 공격 태세를 점검했다.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의 이름을 따서 '보아제 섬'이라 했고, 신미양요 때는 나무가 울창하다 하여 '우디 아일랜드' 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인천지명고》에서는 작약도를 인천의 주요 관광지 12곳 중 다섯 번째로 소개하고 있다.
‘작약도는 영종도 동북방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다. 원래의 이름은 물치도이다. 영종진에 땔나무를 공급하던 수목지로 부천군에 예속된 섬이었으나 1963년 1월 1일에 인천시에 편입되었다. 일제 때에는 스스기라는 일본인의 소유였으나 해방 후 화수동에 살던 이종문이란 사람이 여기에 고아원을 설치 운영하다, 6·25와 더불어 폐쇄되었는데 그후 성창희라는 사람이 불하받았다고 해서 한때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천혜의 지형과 수목으로 덮여 있는 작약도가 지금은 정태수의 개인 소유이며, 그 경관과 피서지로서 경향각지에서 관광객이 수없이 찾아들고 있다. 작약도란 이름은 섬 형태가 마치 작약꽃 봉우리 모양 생겼다고 지은 이름이라 한다.’
이 책이 나온 때가 1993년이다. 당시의 주인이라던 정태수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보그룹 회장을 말한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정태수 회장은 해외 도피생활을 해 왔는데, 2019년 그의 넷째 아들이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되고 나서야 2018년 12월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작약도를 소유한 사람은 여럿이 있었으나 누구 하나 잘 된 경우가 지금까지 없었다. 조선시대까지는 섬을 개인이 소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왕실 소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 개인 소유자는 《인천지명고》에 등장하는 것처럼 일제시기의 '스스기'라는 일본인이다. 이 이름은 인천시립박물관의 이경성 초대 관장의 회고록인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에서도 거론된다.
‘작약도에 살던 스즈키라는 사람이 도자기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나는 홈펠 중위와 최원영과 더불어 찾아갔더니 이미 물건은 없어지고 그 집은 고아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친걸음에 정보를 수집하여 보니, 그 유물들을 영종도에 옮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종도로 건너간 우리는 어느 민가 담 밑에 숨겨 놓은 한 트럭분의 도자기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작약도의 주인이었던 스즈키라는 일본인은 미술품을 보는 눈이 없어서인지 1000점에 달하는 것들이 모두 가짜였던 것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1일 개관한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할 유물을 찾아다녔던 사연의 일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도자기 유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경성 관장도 일부 도자기들이 가짜임을 모르고 몇 점을 골라 고려청자라고 인천시립박물관에 진열했던 모양이다. 해방 후 최초의 공립박물관이던 인천시립박물관에 가짜를 진열해 놓았다는 얘기가 어느 잡지에 실렸다. 이 관장은 톡톡히 창피를 당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1976년 한보그룹에 넘어갔던 작약도를 한보사태 직전인 1996년 인천의 해운업체인 원광이 인수해 해상 관광단지로 개발하려 했다. 하지만 원광마저 부도가 났고, 2005년에는 진성토건이 매입해 대대적인 작약도 개발 계획을 발표했으나, 진성토건 역시 부도가 나고 말았다. 이후 진성토건 채권단 손에 넘어갔다가 2020년 2월, 부동산 경매 중개 전문기업이 법원 경매를 통해 94억 원에 낙찰 받았다. 작약도는 운명적으로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섬으로 보였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관심이 크다. 2019년 인천시는 작약도를 매입해 관광지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는데, 낙찰 기업으로부터 적정 가격에 사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공 개발을 통해 작약도의 기구한 운명이 제 자리를 잡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변신하기를 바란다.
작약도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여러 재력가들이 떼돈을 벌기 위한 관광지로 개발하려고 애쓰는 와중에도 작약도는 문학소녀들의 시심을 돋우는 소중한 공간으로 기능했다. 이를 증명하듯 문둥이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이 인천여고 학생들과 함께 작약도에 소풍을 갔다가 쓴 시가 전해진다. <작약도>, 인천여고 문예반과'라는 부제를 달았다.
‘작약꽃 한송이 없는 작약도에
소녀들이 작약꽃처럼 피어.
갈매기 소리 없는 서해에
소녀들은 바다의 갈매기.
소녀들의 바다는
진종일 해조음만 가득 찬 소라의 귀.
소녀들은 흰 에이프런
귀여운 신부
밥 짓기가 서투른 채
바다의 부엌은 온통 노랫소리.’
이 시는 《한국문학》 1977년 6월호에 실렸다. 한하운 시인이 이때 인천여고 문예반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쳤던 듯하다. 시인도 작약도라는 이름이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궁금했나보다. '작약꽃 한 송이 없는 작약도'를 시의 첫머리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아 섬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게 영 못마땅하다는 눈치다. 학생들은 작약도에 가서 밥도 지어먹을 정도로 오래 머물렀다. 서투른 밥 짓기가 시인의 눈에 잡히고 말았다.
최근 행정구역 관할 관청인 인천 동구가 작약도의 이름이 일제강점기에 엉뚱하게 지어진 점을 바로잡기 위해 예전에 불리던 물치도로 바꾸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이 안은 인천광역시 지명위원회를 통과했으며, 2020년 하반기 국가지명위원회를 통과하면 작약도라는 이름은 물치도로 환원된다. 하루 빨리 작약도가 공공의 영역으로 돌아와 지금 학생들도 작약도에 소풍가서 40년 전 문학소녀들과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 그랬던 것처럼 섬 나들이를 노래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인천 앞바다의 광활한 섬 지역을 관할하는 옹진군청은 섬이 아닌 육지에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옹진군을 이루는 섬들이 백령도나 연평도, 덕적도, 영흥도, 장봉도 등지로 넓게 퍼져 있다 보니 어느 한 곳을 군청 소재지로 삼지 못하고 아예 제3지대라 할 수 있는 뭍에다 세운 게 아닌가 싶다. 옹진군청이 자신의 행정구역이 아닌 다른 동네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도 색다른데, 그 주변에는 다소 어리둥절한 지명이 또 있다. 옹진군청 바로 옆 사거리를 '낙섬사거리'라 칭한다. 경인고속도로, 제2경인고속도로, 인천~김포고속도로 등 주요 도로와 연결되는 곳이어서 교통량이 많기로 유명하다.
섬은 볼 수조차 없는데 낙섬사거리라니. 지명은 늘 그 땅의 내력을 알려준다. 이 지역은 몇 십 년 전에 매립된 곳이다. 그 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지대였다. 거기, 낙섬이 있었다. 낙섬은 납섬에서 유래했는데 납섬이라는 말의 유래는 다양하다.
낙섬사거리 근처에는 원도라는 섬이 있었다. 섬이 원숭이 모양처럼 생겨 그렇게 불렀다. 원도에서는 신라 때부터 원도사라는 사당에서 해신제를 지냈다. 원숭이를 일컫는 잔나비의 '나비'가 납섬이라고 할 때의 '납'으로 변했다는 설과 제사를 드리다는 뜻에서 납섬으로 불렸다는 설 중 어느 것이 맞는지 몰라도 지금의 낙섬사거리는 원도에서 유래한 지명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낙섬사거리 육교 부근에는 '원도사 터'를 알리는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낙섬사거리에서는 병자호란의 살벌했던 전투 상황도 이야기할 수 있다. 병자호란이라고하면, 보통 남한산성이나 강화도를 떠올리지 용현동 낙섬사거리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용현동에는 2018년 개원한 인천보훈병원이 있다. 그 뒤편 언덕마을 깊은 골목에 '이윤생 • 강씨 정려'가 단출히 세워져 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호, 그 안내판에 설명이 나와 있다.
‘이윤생은 인천에서 대대로 살아온 부평이씨의 후손으로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인 원도로 들어가 적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으나 의병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 강씨는 바다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에 나라에서 철종 12년, 정려를 내리고, 이윤생을 좌승지, 부인 강씨를 숙부인으로 추증하였다.’
미추홀구 용현동이 어째서 서울의 동쪽 남한산성과 한강 하구 강화도의 길목이란 것일까.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은 1636년 12월이고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잇따라 함락된 것은 1637년 1월이다. 원도의 전투도 1월에 있었다. 많은 이들이 배를 타고 강화도에 가려면 강화와 김포 사이의 염하를 건널 것으로 생각하지만 겨울에는 쉽사리 배를 띄울 수 없었다. 염하가 얼기도 했으며, 한강에서 떠내려 오는 유빙에 배가 침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는 바다가 얼지 않는 강화도 남쪽 바다를 택해야 했다. 예전에는 원도나 월미도 등지에 강화도로 가는 배터가 있었다. 조선시대 이야기만이 아니다. 1960년대 말 강화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강화도와 인천을 잇는 뱃길은 동구 화수부두 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강화도로 통하는 뱃길이 있던 곳, 원도는 병자호란의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다. 그 요충지에 의병들이 들어가 청군의 맹렬한 정규군과 붙었으니 승패는 이미 정해진 바였다.
의병의 날(6월 1일)을 하루 앞둔 2019년 5월 31일 오후 '이윤샘 • 강씨 정려'를 찾았다. 인천에서 25년 가까이 살면서 처음이었다. 골목은 정말 높고도 깊었다. 동네 할아버지 두 분한테 안내를 받고서야 겨우 찾았다. 의병의 날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로 삼았다고 한다. 인천에서는 6월 1일 어름에 낙섬사거리나 '이윤생 • 강씨 정려'를 찾아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이윤생과 함께 청군들과 싸우기 위해 의병이란 이름을 내걸고 일어났던 인천 지역 수많은 민초들의 죽음도 함께 떠올려야 한다. 이윤생은 양반이었기에 역사에 기록되어 남았지만 평민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이윤생의 부인은 금천 강씨였는데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금천은 지금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일대의 관악산 주변이다. 나라에서는 이윤생과 그 부인을 본보기 삼아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정려를 내렸다. 그러나 그 후 5년 만에 병인양요가, 10년 뒤에 신미양요가 일어나는 등 나라는 자꾸만 기울어갔다.
경인전철 동인천역에서 내려 남광장 쪽으로 나오면 커다란 삼거리와 마주하게 된다. 광장 정면으로 쭉 뻗은 대로 왼편이 용동이다. 1970~80년대만 해도 인천의 명동으로 불릴 만큼 화려했는데 지금은 대낮에도 오가는 사람이 드문 쇠락한 옛 동네가 되었다.
여기에 인천시 민속자료 제2호 '용동 큰우물'이 있다. 기와를 얹은 보호각과 그럴 듯한 글씨의 현판이 제법 운치를 돋운다. 현판은 우물 보호각을 개축해 다시 세운 1967년에 동정 박세림이 썼다. 보통 때는 우물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게 흠이다. 누군가 쓰레기라도 버릴 것을 걱정해서인지 뚜껑으로 박아 놓았다. 우물 바로 앞에서 식당 '금촌집'을 운영하는 문성분 할머니가 우물 관리인 격으로 있다. 곱창전골이 일품인 이 식당도 1972년부터 여태껏 하고 있다니 용동 큰우물과 함께 이 동네의 명물로 손색이 없다.
용동큰우물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우물 안내판에 적힌 내용을 보자.
‘1883년 인천 개항 무렵에 현재와 같은 우물로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는 자연 연못으로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하여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인천 시민들의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광복 후, 수도 사정이 좋지 않을 때에도 인천 시민들의 생활용수로 활용되었다. 우물의 크기는 지름 2.15미터, 깊이 10미터고 우물 내부는 자연석과 가공된 돌을 둥글게 쌓아 만들었으며 지상에 노출된 윗부분은 원형의 콘크리트 관으로 마감하였다. 우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1967년 기와지붕의 육각형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현판은 인천 출신의 서예가 동정 박세림이 썼다.’
우물은 군부대에서도 길어갈 만큼 수량이 풍부했다고 한다. 그 옛날부터 용동은 우물만 유명했던 게 아니다. 권번, 속칭 기생집도 알아줬다. '용동권번'이란 이름이 생겨날 정도였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1936년의 '인천상공인명록' 등을 근거로 펴낸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 :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에 따르면, 용리 (지금의 용동)에서 주류나 음식물 판매업을 하고 세금을 내던 음식점은 8곳이었다. 이들 술집에서는 모두 이 용동 큰우물의 물을 썼을 게 틀림없다.
권번은 기생들의 활동 무대이면서 동시에 교육기관이었다. 그 명칭도 수시로 바뀌었다. 용동권번의 경우 1900년대에는 용동기가로 불렸고, 1910년대에는 용동기생조합소, 1920년대에는 용동권번, 1930년대에는 인화권번, 1930년대 말에는 인천권번으로 그 명칭이 변했다. 여러 기록을 보자면, 용동권번의 기생들은 평양이나 서울 기생보다는 낮게 평가되었지만 개성에 비해서는 나았다고 한다. 특히 잡가 실력만은 어느 지역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아마도 평양이나 서울에 비해 인천 손님들의 출신지역이 다양했기 때문에 그 취향에 맞추기 위해 기생들이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큰우물 바로 옆이 한국 미학의 개척자 우현 고유섭 선생의 생가터다. 지금의 동인천 길병원 자리다. 우현 선생이 이곳에서 출생했음을 알리는 표석을 세우고, 일대 큰길과
골목길을 ‘우현로'로 명명해 선생을 기리고 있다.
어릴 적 한학을 공부한 우현은 1914년 인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18년 졸업했다. 그 이듬해인 1919년에는 용동 일대에서 꼬마들과 함께 3·1 만세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당시 우현이 그려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동네를 뛰어다녔다는 구체적인 증언도 있다. 흑인시인으로 불리는 배인철의 형인 배인복은 당시 여덟 살 이었다. 용동에 살던 그는 우현이 준 태극기를 흔들며 동네를 두 바퀴째 돌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다. 어린 아이들은 훈방으로 풀려났지만 열네 살이던 우현은 유치장에 갇혔다가 사흘 만에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풀려나왔다. 우현의 부인 이점옥 여사도 비슷한 증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우현의 용동 만세운동이 틀린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그런데 인천지역 3·1만세운동사에서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우현은 1920년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인천에서 통학하면서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에서 문예부 활동을 했다. 1925년 경성제국대학 문과에 입학, 미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1930년 경성제대를 졸업했고,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취임했다. 1944년 간 경화로 사망했다. 개성 청교면 수철동에 묘소가 있다.
용동 큰우물과 용동권번, 고려청자의 우현, 그리고 길병원, 물맛은 술맛과 직결된다. 고려청자와 술병도 멀리 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술은 알코올이며, 알코올은 병원의 상징으로 이어진다. 모두 흥한 이 넷을 이렇게 묶으면 억지일까?
강화도 북단 양사면 제적봉에는 평화전망대가 있다. 가까이에서 북녘을 바라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다. 이북 실향민들이 특히 많이 방문한다. 전망대에서 북한 개풍군 대성면 삼달리까지의 거리는 2.3킬로미터이고, 전망대 아래쪽 철산리에서 북쪽 해창포까지는 1.8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바로 코앞에 보이는 거리다. 강화와 개풍, 이쪽과 저쪽 사이를 흐르는 강물을 예부터 조강이라 일컬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교동을 지나 서해에 이르는 물길이다. 조강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 3개의 강물을 하나로 품고 흐른다. 조강이라는 이름은 남북이 분단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이 왕래하지 않는 강이 되다 보니 그 이름을 부를 일이 없었고 자연스레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남북 최단거리, 강화 철산리와 북쪽 해창포, 이곳이 6·25전쟁 직후 남북 간에 은밀한 물물교류가 이루어진 루트였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까맣게 지워졌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으로 남북이 서로 쳐다보지도 않던 그 휴전 직후에 철산리와 해창포를 뱃길로 오가면서, 서로의 물건을 주고받는 교류가 있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강화도 노인들은 그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걸 '이북장사' 라고 했다. 대놓고는 못하고 몰래 은밀하게 하다 보니, 위험하기는 했지만 이문이 많은 장사였다. 이익이 크다 보니 목숨을 내걸고 했다. 이북장사는 두 패거리가 주도했고, 우두머리는 모두 개성 출신이었다. 강화읍내에 간판까지 단 사무실도 있었다.
휴전 직후 남북을 오갈 수 없게 된 엄혹한 현실 속에서 민간인들이 어떻게 서로의 물품을 교환하는 장사를 할 수 있었을까. 군 당국이 뒷배를 봐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 패는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통하던 김창룡 당시 육군 특무부대장이 밀어줬고 다른 패도 라인이 있었다. 북한 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화에서는 페니실린 같은 약품이나 신발류, 옷가지 따위를 싣고 갔다. 북에서는 원산 북어, 명천 다시마, 은수저 등등의 물건이 넘어왔다. 조강을 건너야 하는 일이어서 배에 실을 수 밖에 없었다. 강화 철산리 산이포에서 출발해 개풍의 영정포나 해창포를 드나들었다.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배는 밤에만 움직였다. 일정은 예측할 수 없었다. 1주일도 걸렸고 한달이 넘을 때도 있었다.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북의 군 당국은 이북장사 하는 사람들을 이용해 상대방의 정보를 캐내기도 했다. 물건을 싣는 배에 서로가 간첩을 태워 보내기도 했다. 군 당국이 이북장사의 뒷배를 봐준 것은 첩보전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북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노출된 이중간첩처럼 되어 있었다.
교환해온 물건을 팔면 이윤이 곱절도 넘었다고 한다. 이북장사로 큰돈을 벌어 유명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 개성상회 한창수 회장과 서흥캅셀 창업주 양창길 회장이 그들이라고 속내를 잘 아는 강화의 노인들은 증언한다. 한창수 회장은 강화에서 이북장사로 돈을 번 뒤 서울 을지로에 개성상회를 열었다. 강화에서 장사할 때는 개성상회 간판을 달지 않았고 강화읍 서문 밖 개인 주택을 세 얻어서 살림집 겸 사무실로 썼다고 한다. 양창길 회장은 강화에서 고려약방을 운영했다. 이북장사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품목이 약이었는데, 그는 두 패거리 모두에게 약을 대주면서 큰돈을 벌었다. 이북장사 두 패와 양 회장, 셋 모두 개성 출신이었다.
이북장사는 오래가지는 못했다. 군의 내부갈등 때문이었다. 원용덕 헌병사령관 쪽에서 김창룡 특무부대장을 비위 혐의로 친 적이 있는데 이북장사도 표적이 되었다. 헌병대가 강화 사무실에 들이닥쳐 이북에서 가져온 물건을 싹 쓸어갔다.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당한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 특유의 파벌 견제방식 때문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만주 군맥을 다룬 책 《기시노부스케와 박정희》에서는 김창룡을 만주국 또는 일본 관동군 소속 장교나 헌병으로 위세를 떨친 대표적 인물로 소개한다. 이 책에 따르면,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으로 있으면서 30여 개의 항일조직을 적발한 죄로 해방 후 북한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호송 도중 도망쳐 남한으로 내려와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어, 군 내부 좌익 색출로 이름을 떨쳤다. 《인물로 보는 해방정국의 풍경》을 쓴 신복룡 교수는 김창룡의 별명이 '스네이크김'이었다고 소개한다. 북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월남한 뒤 남한 군부를 비롯한 곳곳에 퍼져 있던 좌익 인사들을 뱀처럼 독하게 잡아냈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을 터다.
이런 김창룡도 결국은 같은 일본군 출신 헌병사령관 원용덕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직후 원용덕의 헌병대와 김창룡의 특무대를 통해 군부를 견제하고 사찰기관 상호 간 경쟁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권력기관의 독점을 방지했다. 군부에 파벌을 키워 서로 견제토록 하는 방식도 구사했는데 여기에 김창룡이 걸려든 거다. 하지만 당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김창룡이 지원했던 이북장사 적발 소식은 철저히 묻히고 말았다. 군 내부의 비위를 밖으로 알리지 않고 비밀에 부친 거였다.
이북장사로 얻어진 이익은 개성상인들에게는 남한에서 일어설 밑천이 되었고, 부패한 군부 세력에게는 뒷돈이 되었다. 지금도 강화에 사는 노인들 중에는 당시 이북장사를 통해 들여온 물건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다. 우리 현대사의 기막힌 사연을 증언하는 귀중품이다.
인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독배로를 타고 가다 비류대로와 교차하는 옥골사거리에 다다르면 옥련터널이 나온다. 거기에서 우리는 두 개의 '송도'를 만나게 된다. 도로 표지판은 좌회전하면 '송도역'이라고 가리키고, 터널 오른편 언덕에는 '송도고등학교’ 건물이 우뚝하다. 그 반대로, 능허대공원에서 옥련터널 쪽으로 난 길도 마찬가지다. 도로 표지판에는 우회전 하면 '송도역 삼거리'를, 직진하면 '송도고'를 가게 된다고 표기해 놓았다. 두 ‘송도’는 같은 곳일까. 아니다. 태생부터가 전혀 다르다.
송도역, 송도역 삼거리, 송도유원지, 송도신도시는 '송도(松島)', 송도고등학교, 송도중학교는 ‘송도(松都)’다. 섬과 도읍, 한글로는 같은데 한자로는 완전히 다르다. 송도신도시의 송도는 일제가 붙인 왜색 지명이고, 송도고등학교의 송도는 북한 땅 개성을 일컫는다.
송도는 일본어로 마쓰시마라 한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킬 때 이미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라고, 울릉도를 마쓰시마(MATSUE SHIMA)라고 하며 세계에 홍보했다. 영국의 주간 화보집 《런던 뉴스》도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1월 16일 자에 이 같은 지도를 실었다. 하지만 일본은 메이지 시대 초반까지만 해도 울릉도가 아니라 독도를 마쓰시마라 하고, 울릉도는 다케시마라 불렀다. 독도가 다케시마가 된 건 그 뒤의 일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들이 부르는 두 섬의 호칭이 갑자기 뒤바뀐 거다. 이렇게 일본은 예전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헷갈리고 있었다. 자기네 땅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혼동이 가능하다고 본다.
인천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처음 이 이름을 썼다. '송도유원지'의 송도가 같은 의미다. 송도유원지는 1920~30년대 서울 사람을 비롯한 전 국민의 휴양지 역할을 하던 월미도 유원지의 대체재로 만들어졌다. 일본인들의 휴양시설을 목적으로 1937년 개장했다. 해방 이후에는 금단의 땅이 된 월미도 대신 송도유원지에 수도권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1969년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송도유원지 내 해수욕장은 수문개폐 시설을 통해 수량을 조절하는 국내 최대의 인공해수욕장이었다. 모래사장을 만들기 위해 무의도에서 트럭으로 30만 대분의 모래를 실어 날랐다고 한다.
앞에서 얘기했던 도로 표지판에 적힌 수인선의 '송도역’도 같은 시기에 생겼다. 송도유원지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수인선 노선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도 용케 옛날 역사가 보존되고 있다. 송도 역사는 1937년 8월 5일 수인선 개통과 함께 운영을 시작했다. 1973년에는 송도~남인천 구간이 운행을 중단함에 따라 수인선의 종착역이 되었고, 1994년 9월 1일 문을 닫았다. 협궤철로가 철거되고 역의 기능을 상실했으나 부속 숙직실, 화장실, 우물터 등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송도정, 송도역, 송도유원지, 이 셋은 사람으로 치면 1937년생 동갑내기다. 섬도 아닌 곳에 왜 섬 이름을 붙였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연안에 있는, 일본 3대 절경 중 하나라는 미야기현의 군도 마쓰시마에서 따왔다는 설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동원했던 순양함 마쓰시마 호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는 설과 인천시장격인 인천부윤을 지낸 마쓰시마 기요시를 기리기 위해 붙였다는 설도 있다. 어느 게 맞는지 몰라도 이 이름은 송도경제자유구역, 송도신도시, 연수구 송도동, 인천대학교 송도캠퍼스 등으로 가지치기를 계속해 왔다.
또 다른 의미의 송도는 고려의 왕도 개경을 일컫는다. 그 이름에서는 조선에 나라를 넘겨주고 지금까지 600년간을 유랑한 자들의 오래된 디아스포라적 냄새가 풍기는데, 인천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그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송도고등학교와 송도중학교는 1906년 10월 3일 개성 송악산 기슭 산지현에 문을 연 '한영서원'에서 출발한다. 윤치호가 인삼 제조실로 쓰이던, 초가지붕으로 된 뜸집에서 시작한 교육기관이다. 14명의 학생이 이곳에서 배움을 시작했고, 개교 2년이 지났을 때 석조 3층 건물로 신축했다. 1917년 3월 4년제 '송도고등보통학교'로 개명했다. 6·25전쟁중이던 1952년 4월, 인천 중구 송학동에 가교사를 마련해 500여 명의 남녀 피란 학생들을 교육하면서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1년여 뒤 답동으로 이사했다.
송도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송도학원은 한때 재정난에 허덕였지만 1975년 2월, 동양화학 설립자 송암 이회림 회장이 이사진에 합류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송암은 연수구 옥련동에 교사를 신축해 고등학교를 이전하고, 운동장과 체육관, 과학관 등을 지어 규모를 늘려 나갔다. 2020년 1월 8일엔 100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일제 때 이름이 바뀐 뒤부터 따지다 보니 설립연도보다 졸업 횟수가 늦다.
'마지막 개성상인'으로 불리던 기업가 송암은 자신의 호에 '송도의 '송'자를 넣어 개성 사람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실향민이던 그는 북한 미술을 좋아해 국내 최고의 북한 미술 컬렉터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고미술 전반에 조예가 깊어 1992년 10월 인천에 송암미술관을 열었는데, 2005년 6월 미술관과 1만 점 가까운 소장품을 인천광역시에 기증했다.
인천 학교에는 개성에서 피란 나온 곳이 또 있다. 경인교대도 1946년 5월 개성에서 공립 사범학교로 설립된 개성사범학교에서 시작한다. 6·25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2년 4월 1일 인천으로 옮겨왔다. 국립 인천사범학교, 인천교육대학, 경인교육대학교로 이름을 바꾸며 오늘에 이르렀다. 인천 미추홀구청 민원실 앞에는 '여우실 경주김씨 종가 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자리가 바로 인천교대가 있던 곳이다. 여우실은 예전부터 불리어 오던 이 동네 이름이다. 인천의 명문가 김은하 전 국회부의장 집안의 아흔아홉 칸 저택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김은하 부의장 집안의 아흔아홉 칸 저택은 원래 미추홀구청 정문 쪽에 있었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부평을 군수기지로 삼고, 여우실 저택 부지를 일본군 병영으로 지정해 헐어냈다. 김 부의장의 부친은 100미터쯤 떨어진 민원실 쪽에 꼬박 2년이 걸려 아흔아홉 칸을 새로 지었다. 당시 목재 건축의 최고수로 꼽히던 개성 목수들을 고용했다. 왕궁을 보수할 때 개성 목수들을 썼다고 하는데, 고려를 뒤엎고 선 조선일지라도 목수만큼은 고려 때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온 개성 출신을 우대했던 모양이다. 일제는 한국 사람이 큰 집을 갖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난데없이 지금 미추홀구청 정문에서 용현시장과 독쟁이 언덕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개설했다.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아흔아홉 칸 중 서른네칸이 또 다시 헐려나갔다.
이 집 일부는 6·25전쟁 직후 인천교대에 자리를 내주었고, 미추홀구청이 민원실을 신축할 때 나머지 집터마저 넘겨주었다. 김은하 부의장은 이 집에서 제6대부터 11대까지 내리 6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기록은 아직도 인천에서 깨지지 않고 있다.
송도는 여전히 일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아픈 현실을 깨닫게 하고, 송도는 천년 도읍 개성의 젊은 혼을 키워내고 있 뿌듯함을 갖게 한다.
인천의 명승지 제1번은 어디일까. 선뜻 대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 승지가 경치 좋은 곳을 말하고 그 앞에 명자가 붙었으니, 명승지의 기본 조건은 경관이 뛰어난 동시에 사람들에게 이름이 나 있어야 한다. 인천에서 제일 경치 좋고 이름난 곳? 어떤 이는 송도신도시를 내세울 것이고, 어떤 이는 강화도나 백령도, 대청도를 말하기도 할 것이다. 인천대교나 월미도, 자유공원, 문학산 등을 거론하는 이도 있을 터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명승지를 대번에 떠올리기 어려운 곳이 인천이다.
1973년에 발간된 《인천시사》 하권에서 소개한 인천의 명승지 첫 번째는 자유공원이었다. 그 시절은 그랬다. 자유공원에 서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 하나만으로도 으뜸으로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가 수봉공원이었고 지금은 알 수도 없는 도원공원, 목공원, 동산공원이 그 뒤를 이었다. 일제강점기 수도권 최대 유원지이자 환락의 공간이었던 월미도는 여섯 번째로 밀렸다.
자유공원은 인천이 아주 오래 전부터 국제도시였음을 보여준다. 한반도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조성되었는데, 1897년 만들어진 서울 탑골공원(파고다공원)보다 9년이나 빨랐다. 1888년 11월 9일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일본, 중국 등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던 여러 국가의 외교관들이 공동 서명하여 조성되었다. 측량과 설계는 러시아 토목기사 사바틴이 맡았다. 사바틴은 우리나라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인물로, 탑골공원도 설계했다. 자유공원 설계 경험이 탑골공원에 반영되었을 게 분명하다.
이름 변천사도 만만치 않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 불렀다. 이름처럼 관리권 또한 공원조성에 관계한 여러 나라에 있었다. 일제는 1914년 외국인 거류지 제도를 폐지하고 공원 관리권을 지금의 인천시 격인 인천부에 이관한 뒤 이름을 서공원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인천신사를 세우고 그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했는데 신사 주변을 동공원, 원래 있던 각국공원을 서공원이라 한 것이다.
해방된 1945년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가 1957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세우면서 자유공원으로 바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맥아더 장군 동상 옆에는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장면을 조각한 부조 작품을 걸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불편한 진실이다.
인천에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조성한 공원이 들어선 이유는 이곳이 중요한 개항장이었기 때문이다. 1883년 개항된 지 5년이 지난 1888년, 우리 정부는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일본, 중국 등 국내 주재 외국 외교관들과 협약을 맺었다. '인천항구각국조계장정’ 이다. 조계지는 각 나라 사람들이 자유롭게 상업활동 등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뜻이다. 각국 영사관도 잇따라 들어섰다. 조계지로 땅을 내주었다는 점은 불평등조약의 대표적 사례이기는 하지만 국제도시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뒤 100년, 인천에는 또 하나의 국제도시가 들어섰다. 송도경제자유구역이다. GCF(녹색기후기금) 등 여러 국제기구 사무실이 입주한 송도는 미국 게일사가 개발했다. 130년 전 개항시기에 그랬듯이, 오늘날도 우리는 국제도시 하나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각국공원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이곳에서 처음 열렸다는 점이다. 1919년 4월 2일, 검사직을 집어 던지고 독립운동을 벌이던 홍진과, 기독교 전도사 이규갑, 천도교 지도자 안상덕 등이 비밀리에 각국공원으로 찾아들었다. 지역과 종교 대표 20여 명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엄지손가락에 흰 종이나 헝겊을 감고 나타났다. 이날 모임에서는 임시정부의 약법과 정부조직안을 확정하고, 이 내용을 서울 국민대회에서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일제의 감시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에 이들은 왜 인천 각국공원에서 모임을 가졌던 것일까. 자유공원 정상에 올라 인천항을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각국공원 조성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서양식 건물이 세워졌다. 인천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인 세창양행 사택이 가장 먼저였다. 1884년 준공된 단층 벽돌집으로, 화학약품, 염료, 화약, 면도칼, 바늘 등 유럽산 제품을 수입 판매하던 독일계 회사 세창양행 직원들의 숙소였다. 이 건물은 해방 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쓰였지만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격을 받고 소실되었다.
공원이 들어선 응봉산 정상에 우뚝하게 자리잡아 인천의 랜드마크로 불리던 존스턴 별장도 있었다. 1905년 준공된 이 별장은 석조 4층 규모로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 상하이에서 항만 건설업을 하던 영국인 제임스 존스턴의 여름 별장이었다. 설계는 독일인이 하고 시공은 중국 업자가 했다. 지붕을 장식한 붉은 기와는 중국 칭다오에서, 조명을 비롯한 전기 관련 장치는 세창양행을 통해 독일에서 수입했다. 가구는 모두 영국에서 들여왔으며 내부 목조 장식을 위해 상하이에서 12명의 조각가들이 출장을 오기도 했다. 국제도시에 딱 맞는 건축물이었던 셈이다.
존스턴 별장은 몇 번 주인이 바뀐 끝에 1936년 인천부청에서 인수해 서공원회관이라 했다가 곧바로 인천각으로 고쳤다. 고급 여관 겸 요정이었다. 이곳에서 연회를 열었던 인물 중 인천의 1호 의학박사 신태범이 있다. 신태범 박사는 저서 《인천 한 세기》에서 ‘1943년 봄에 학위를 받은 축하회를 인천각에서 가졌는데 장광순 선배가 진행을 맡고 내빈도 많아 성황을 이루었었다. 그때 박사가 된 기쁨도 컸었으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존스턴 별장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기쁨이 나의 가슴을 한층 벅차게 했었다’고 술회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나와 거기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조차 인천각 무대에 서보는 게 꿈이었다니, 일반 서민들의 눈에는 그 인천각이 어떻게 비쳤을까.
해방 후에는 미군들이 고위장교 숙소로 사용했으나 1950년 인천상륙작전 당시 함포사격에 파괴되었다. 최성연 선생은 <인천각>이라는 작품을 지어 이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을 아쉬워했다. '오정포산'으로 시작하는 작품에는 여적도 남겼다. 오정포산의 본래 이름은 응봉산인데, 일제시기 이곳에 있던 인천측후소에서 낮 12시에 시각을 알리는 소형 산포를 공포로 발사해 오정포라 불렀다고 선생은 설명하고 있다. 인천각과 관련해서는 건축비로 30만 달러가 들어갔다고 밝혔다. 30만 달러면 지금으로 따져도 3억5000만 원이 넘는데,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상하이조선소 사장이던 존스턴은 인천각이 몹시 흡족했던지 인천각과 똑같은 쌍둥이 저택을 상하이에도 지었다고 한다. 상하이에 이 건물이 남아 있다면, 전쟁으로 파괴되기까지 4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어떤 건물보다도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가진 인천각의 복원도 가능할 것이다.
제물포는 옛 인천의 이름이기도 하다. 지금으로 치면 월미도와 올림포스호텔 주변의 내항 지역, 자유공원에서 신포동에 이르는 일대를 일컫는다. 개항기 인천을 오가던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불렀다. 제물포는 1883년 개항한 신항만 도시였다. 해외에서 서울로 가거나 서울서 해외로 나가는 여행객들은 제물포에서 하룻밤을 자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 인천에 들어선 이유다.
1888년 문을 연 대불호텔은 경인철도가 운행을 개시한 1899년까지 호황을 누렸다. 철도가 생기자 여행자들은 항구에서 하루를 더 묵을 이유가 없어졌다. 배에서 내린 뒤 곧바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 끊긴 대불호텔은 중국인들이 인수해 요릿집으로 바꾸었다. 중화루다.
인천항, 그러니까 제물포는 이렇듯 서울과 해외를 이어주는 역할만 한 게 아니었다. 서울과 평양을 연결해 주는 중간 지대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으로는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백령도나 연평도를 오가는 뱃길도 자유롭지 못한 판에 무슨 평양을 오가는 배가 있었겠느냐 싶다. 육로로 곧바로 가면 되지 굳이 하루를 묵어가면서 인천에서 배를 타고 서울과 평양을 다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도가 생기고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서울과 평양을 육로로 다니는 것이 인천을 거쳐 뱃길을 이용하는 것보다 두 배 정도 먼 길이었다.
실제로 서울과 평양을 인천항 뱃길을 통해 오갔던 얘기를 19세기 한반도에 와 있던 의료 선교사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 홀 부부는 1894년 갓난아기인 셔우드 홀을 데리고 평양을 방문할 때 제물포~평양 뱃길을 이용했다. 당시 서울에서 평양을 육로로 가려면 1주일 정도 걸렸는데 제물포에서 배를 타면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홀 부부와 동행한 박유산과 에스더 박 부부는 우리나라 의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에스더 박은 미국에서 공부한 첫 한국인 의사이고, 박유산은 부인의 공부를 외조했다. 서재필이 에스더 박보다 먼저 미국에서 공부한 의사였지만 그는 유학 중 귀화한 미국인이다.
홀의 얘기에 따르면, 1920년대 제물포에서 해주로 가는 배편도 있었다. 해주 병원에서 쓸 각종 기구와 보급품을 싣고 출항했다. 배가 오전 6시에 출발했기 때문에 홀 부부는 전날 서울을 떠나 제물포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해주까지는 육로로 가는 길이 어렵지 않았지만 멋진 해안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뱃길을 택했다고 전한다.
제물포, 인천항은 이렇듯 남과 북을 연결하는 중요 항구였다. 철길이 놓이기 전에는 서울과 평양의 중간지대 역할을 충실히 했다. 하지만 남북분단과 함께 그 뱃길도 끊기고 말았다. 남과 북이 자유로이 왕래하게 될 때 인천은 다시 그 중간 지대로 기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는 신항에 많은 기능을 내어준 인천 내항에 서서 영종도 방면으로 짙게 물드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남북 교통로로서의 인천항을 다시 떠올린다.
집에 같은 책을 두 권 갖고 있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사 놓기만 하고 읽지 않다 보니 책꽂이 어딘가에 있는 줄을 모르고 또 사는 바람에 빚어지는 일이다. 조세희의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경우가 좀 다르다. 오래 전에 구입해 놓았지만 2017년 상반기 한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300쇄를 돌파해 기념으로 한 권 더 샀다.
국내 소설 중 손꼽히게 많이 읽힌 《난쏘공》은 1970년대 인천의 노동자 가족 이야기다. 자동차 공장 일이 고되어 잠을 자면서도 코피를 쏟아야 하는 노동자 이야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한 달 월세 1만5000원 쪽방에 사는 가족의 가계부 내역이 고스란히 나온다. 읽다가 책장을 더 이상 넘기지 못하고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한 대목이 있다. 앞집 아이 교통사고 문병 230원, 길 잃은 할머니 140원, 불우이웃돕기 150원. 520원을 이웃돕기에 쓴 것이다. 두통약 100원, 치통약 120원을 써야 할 정도로 몸까지 불편한 사람이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흔쾌히 주머니를 터는 모습은 당시 우리 사회의 일반적 풍경이었다. 그리 멀지도 않은 30~40년 전 이야기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가계부를 쓰던 《난쏘공》 속 가족은 엄마와 삼남매, 네 식구다. 죽어라 일해서 버는 삼남매의 한 달 수입 총액은 8만231원이었다. 보험료 등을 빼면 엄마가 손에 쥐고 살림할 수 있는 돈은 6만2351원이다. 당시 4인 가족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할머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 주머니를 털어 차비를 댔다. 자신이 불우이웃인 그들이 자신보다 더 불우한 이웃을 돕겠다며 기꺼운 마음으로 성금도 내고 행복해 했다.
《난쏘공》은 1978년 6월 초판 1쇄를 출간한 뒤 1996년 6월 100쇄, 2005년 11월 200쇄를 찍었으며, 2017년 4월 300쇄를 출간했다. 우리 문학작품 중 300쇄를 출간한 책은 《난쏘공》 이외에는 아직 없다고 한다.
《난쏘공》의 주요 무대로 등장하는 '기계도시 은강'은 영락없는 인천이다. 인천에서는 1883년 제물포항 개항과 함께 본격적인 부두 노동이 시작되었다. 그 뒤 항만 주변에 각종 공장이 들어서면서 산업도시로 자리잡았고 전국의 노동자들이 밀려들었다. 그 속에는 돈벌이에만 급급한, 노동자들의 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자본가들이 넘쳐났다. 점심시간 15분에 졸음을 쫓기 위해 바늘로 팔다리를 찔러가며 야간작업에 투입되어야 했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위장취업의 상징도시도 인천이었다.
온갖 분야의 공장들이 들어선 복합 공장지대였지만, 한국 최고라며 교과서에까지 실렸던 판유리 공장도 인천을 떠난 지 오래다. 많은 공장들이 중국이나 베트남 등 인건비가 싼 해외로 이전했고, 땅이나 건물 임대료가 저렴한 타 지방으로 떠났다. 경제자유구역과 같은 신도시 개발사업이 이어지면서 거기 들어설 아파트단지에 공장들이 밀려나는 형국이다. 그래도 여전히 인천은 수도권 최대 공단지대이자 항만과 공항을 낀 물류도시다.
《난쏘공》의 주요 무대인 인천 동구와 중구 일대를 걷다 보면 1970~80년대 그 활기차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음을 대번에 알아차리게 된다. 이제는 그야말로 구도심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인천은 여전히 《난쏘공》의 도시다. 노동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버거운 삶을 살아내고 있다.
은강의 인구가 81만 명이었는데 지금 인천의 인구는 300만 명에 달한다. 50년도 안 되어 도시 규모가 4배 가까이 커졌다. 송도와 영종, 청라로 대표되는 경제자유구역의 도시개발이 인구 증가를 주도했다. 그만큼 인천의 빛과 그림자도 선명해졌다. 지금은 인천의 새로운 《난쏘공》을 써야 할 때다.
인천 동구 송현동의 동국제강에서 시작해 현대제철을 지나, 서구 청라국제도시와 경서삼거리로 이어지는 큰 도로를 중봉대로라고 부른다. 중봉대로, 그 이름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언뜻 이해가 안 된다. 중봉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유명한 ‘조헌’의 호다. 최후를 맞이한 700 의총이 있는 충남 금산도 아니고 고향인 경기도 김포도 아닌 인천에 어찌하여 중봉 조헌을 기리는 도로 이름을 붙였을까.
중봉과 인천의 관계는 율도라는 섬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율도를 농사지을 땅으로 개간하고, 왜군이 몰려오자 그 섬으로 가족들을 들여보내 살도록 한 뒤 자신은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강점기까지 낚시터로 유명했다는 율도는 매립되어 흔적조차 없어져버렸다. 조헌이 율도를 개간한 내용은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의 이야기로 알려졌다. 조헌이 상을 당하자 문상을 온 이지함이 “10여 년 뒤에 천하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어 백성이 참살당해도 이를 감당할 사람이 없을 조짐" 이라 말했다. 조헌은 토정의 얘기를 듣고 율도를 개간했다.
조헌은 1571년 홍주에 있을 때 이지함의 학식이 대단히 높음을 알고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그를 찾아가 사제의 연을 맺고 가르침을 청했다. 이때 이지함은 조헌에게 이이, 성혼 등을 스승으로 삼을 것을 추천했다. 조헌은 율곡 이이를 스승으로 섬기고 '율곡을 떠받드는 후학' 이라는 의미로 후율이라는 호도 갖게 되었다. 조헌은 사람을 사귈 때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사고를 가졌는데 이 또한 토정과 율곡에게 배웠음이 틀림없다.
강직한 사림 정신의 소유자 조헌은 개혁론자이기도 했다. 그는 나라가 위급할 때 물러서지 않고 직접 나설 줄 알았다. 그래서일까.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 〈자서>에서 '나는 어릴 적부터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비록 사는 시대는 다르나 말을 끄는 마부가 되어 그분들을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고 했다. 박제가 자신이 얼마나 조헌을 흠모하는지를 밝혀 놓은 대목이다. 실학파의 거장 박제가가 가장 존경했다는 조헌이 개간한 율도를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게 한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율도는 밤톨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인천의 향토사학자 이훈익 선생이 1993년에 펴낸 《인천지명고》는 '율도는 작약도 동북부에 위치하고 서양 사람들은 '구리르' 라 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기함 '규리르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율도는 일제 때부터 가장 좋은 낚시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이 섬은 중봉 조헌이 농토로 개척하여 임진왜란 때 그의 가족이 은신 피난한 곳이기도 하다' 고 설명한다. 또한 이 섬에 인천화력발전소와 경인에너지 공장이 대규모로 건설되었다고 소개한다. 율도 발전소는 1960년대 후반 공사에 들어가 1970년대 초반 가동을 시작했다. 썰물 때 물이 빠지면 걸어서도 오갈 수 있었다는 섬 율도는 이때부터 섬이 주는 낭만적 이미지를 완전히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율도의 주섬인 밤섬은 향나무가 유명했다고 하는데, 그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다. 정유공장과 발전소가 들어서기 이전 율도에는 화약고가 먼저 건설되었다. 1900년이다. 한반도에 매장된 각종 광석을 서로 캐내어 가기 위한 서구 열강들의 치열한 경쟁이 있을 때다. 광산 회사들은 채굴용 폭약을 대량으로 들여왔는데 그 하역 장소가 인천이었다. 1889년 연수구 옹암에 독일계 세창양행 화약 인천 최초로 들어섰다. 곧이어 미국계 타운센드상회가 율도에 조선 최대 규모의 폭약창고를 설치했다.
조헌과 율도를 이야기할 때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은 임진왜란 때 인천의 역할이다. 아홉 의병장의 작품집인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보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치자>라는 조헌의 글이 실려 있다. 그 속에 '아, 조선이여! 천우신조로 하여 아직도 서해안 일대가 살아 있다. 나라를 보위하려는 애국적인 백성이 있거니 어찌 목숨을 바쳐 싸우려는 영웅들이 없을쏘냐' 란 구절이 나온다. '아직도 서해안 일대가 살아 있다' 는 얘기는 왜군이 점령하지 못한 강화도와 문학산 서쪽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라인을 말한 게 아닐까. 실제로 임진왜란 때 강화도는 김천일을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의 숨은 거점 역할을 했다.
강화도에 가기 위해서는 염하를 건너야 한다. 염하, 짜디짠 바닷물이 흐르는 강이라 하여 예부터 그렇게 불렀을 게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 2개의 다리가 염하를 가로질러 김포반도와 강화를 연결한다. 이 염하를 지나면서 평양의 대동강을 떠올려본다. 염하에서의 신미양요와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붙어 있기 때문이다.
1871년 4월 14일, 조선군과 미군의 첫 교전이 있었다. 강화 염하의 손돌목 해역, 조선군은 광성진과 건너편 덕포진에서 미군 함대를 향해 포격했다. 미군은 함포를 쏘면서 퇴각했다. 덕포진의 포군 1명이 사망했다. 신미양요의 시작이었다. 미군은 아흐레 뒤인 4월 23일 초지진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어 덕진진을 손쉽게 함락시킨 뒤 광성진 공격에 나섰다. 어재연 장군이 분전했으나 전투력 차이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미군은 인근 마을로 가 방화와 약탈을 자행한 뒤 정박지인 월미도 앞 작약도로 되돌아갔다. 미 함대는 5월 16일 자진 철수했다. 신미양요 피해 상황은 조선과 미군 기록이 너무나 다르다. 조선은 아군 전사자 53명, 부상자 24명이라고 보고했지만 미군은 조선군 243명 사망, 미군 3명 전사, 9명 부상으로 기록했다.
미군 측이 신미양요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1866년 7월 대동강에서 있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이었다. 미국 상선인 셔먼호가 대동강에 침입해 교역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아대는 등 무력시위를 벌이다 조선의 화공작전에 격침된 사건이다. 배에 타고 있던 토마스 목사 등 여러명이 화난 평양 주민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은 셔먼호 사건 진상조사를 위해 몇 차례 조선에 함대를 보냈다.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그 사건 2개월 뒤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측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당시 한반도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프랑스가 미국에 고자질한 셈이다.
병인양요는 1866년 9월 프랑스 로즈 제독이 군함 7척과 1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 갑곶진에 상륙, 강화성을 점령해 금은보화와 각종 문서, 서적 등을 약탈한 사건이다. 양헌수 장군의 공격을 당한 프랑스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침략 1개월여 만에 인천 앞바다에서 철수했다. 프랑스는 9월의 강화도 침략에 앞서 8월에도 한강 깊숙이 침입해 왔다. 서강 어귀까지 왔다가 모래톱에 좌초되어 물러났다. 그때 1개월 전 대동강에서 있었던 셔먼호 사건을 전해 들었고, 중국 체푸항으로 돌아가 미군 측에 이 내용을 전달했다.
미국의 로우 공사와 로저스 제독은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해협에 나타나 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며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역사적 사건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절대로 혼자 오지도 않는다.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들과 연관되어 있다. 국가 간 외교의 중요성은 어제오늘이 다르지 않다는 교훈을 우리는 이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 그리고 신미양요에서 배울 수 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관련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19세기 우리나라에 와있던 서양 선교사들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90년대 초반 평양지역을 무대로 의료 선교활동을 벌였던 윌리엄 제임스 홀이 그의 부인 로제타 홀에게 한 이야기가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란 책에 언급되어 있다.
“닥터 홀은 아내에게 1866년 이 강에서 항해의 마지막 운명을 맞았던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홍수와 만조로 수위가 높았는데 셔먼호는 그것을 잘못 알고 보산을 지나 더 상류로 올라갔다. 닥터 홀은 평양의 대동문에서 셔먼호의 닻과 체인이 걸려 있는 것을 봤다고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조선 사람들은 그 물건들을 서양 배의 운명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는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있었다.”
철저히 서구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의미심장하게 들여다봐야 할 대목은 침몰한 셔먼호의 닻과 체인 등을 건져내 대동문 위에 걸어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대동문이 어떤 곳인가. 조선 후기 문인 신광수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관서악부》를 지었다. 그는 여기에 평양을 유람하며 읊은 <죽지사> 108수를 담았는데 제64주가 바로 대동문루다. 신광수는 대동문루를 '하늘 가운데 두둥실 떠 있는 것' 으로 묘사했다. 대동문은 홍건적 침입 때 불에 탔으나 조선이 건국된 뒤 다시 만들었다. 장삿배가 대동문 앞에 정박해 물자를 교역하는 등 평양성으로 들어가는 대표적 성문이었다.
1997년 북한을 방문한 유홍준 교수는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에서 평양의 정문답게 늠름한 기상이 서린 성문이라고 말했다. 유홍준 교수와 비슷한 시기에 평양에 갔던 최창조 교수는 쑥섬 근처 대동강가에서 '셔먼호 사건 기념비' 를 보았다고 《최창조의 북한 문화유적 답사기》에 썼다. 나도 2007년에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대동문도 ‘셔먼호 기념비'도 보지 못했다. 그때 그것들을 보았더라면 이 글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염하를 포함하는 인천 앞바다와 대동강은 분단 이전 하나의 물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걸 다시 복원하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고가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수공장에 끌려와 일해야 했던 징용노동자들을 기리는 동상이 2017년 8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인천 부평에 세워졌다. 부평의 인천 육군 조병창은 일제가 세운 한반도 최대 군수공장이었다. 부평공원에 세워진 동상은 조병창에서 육체적 정신적 수탈을 당한 노동자들을 위한 조시이자 조곡이기도 하다. 부평공원은 일제에 이어 주한미군에 의해서도 군사기지로 징발당해온 부평의 기막힌 역사가 서려 있다.
미군은 해방 직후 그러니까 1945년 9월 8일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인천에 진주했고, 그 질긴 인연을 아직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인천항에 입항한 미군이 우선 신경을 쓴 곳이 부평이었다. 일본군의 핵심 군수기지가 부평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1930년대 후일으키면서 군수기지를 부평에 건설했다. 병장기를 만드는 군 시설이라고 하여 조병창 이라고 불렀다. 이 군사시설은 고스란히 미군기지로 전환되었다. 해방과 함께 등장한 미군은 1949년 한반도 철수 이후 1950년 9·15 인천상륙작전 때까지 1년여를 제외하고는 부평을 떠난 적이 없다.
일제는 왜 농경지인 부평에 군수공장을 건설했을까. 방대한 중국 땅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 수행에 부평이 최적지로 평가되었다. 넓은 평야지대인 데다가 부평의 서쪽과 북쪽을 철마산이 둘러싸고 있어 중국 방향에서의 공군 공격을 방어하기에 용이하다는 판단이었다. '조선시가지계획령' 의 후속 작업으로 '경인시가지계획' 이 추진되었고, 일제는 1938년부터 부평 일대에 군수 산업시설을 본격적으로 유치했다. 조병창이 세워지기 전에 먼저 군수 기업 미쓰비시 공장이 들어섰다.
부평 조병창에서는 소총, 탄약, 소구경화포탄약, 총검, 수류탄, 경차량 등을 제작했다. 조병창 주변으로는 금속 기계, 자동차, 화학, 식품, 요업 등 크고 작은 공장들이 잇따라 생겨나, 이 일대는 거대한 군수산업 도시로 뒤바뀌었다. 인천 육군 조병창은 평양에 있던 평양병기제 조소도 관할하는 일제의 해외 군수 거점이었다.
조병창 운영 초창기부터 일했던 노동자의 증언이 인천작가회의가 펴내는 문학계간지 《작가들》 2019년 봄 호에 실렸다. 주인공은 1925 년생 김우식 할아버지. 이상의 인천대 초빙교수가 2017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충남 청양의 자택에서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그 내용을 정리했다.
김우식 할아버지는 17살 때인 1941년 봄부터 1944년 12월 탈출 시까지 제2공장에서 방아쇠를 만드는 반에 소속되어 연마작업을 담당했다. 3개월간 기능자양성소에서 훈련을 받고 나오면 1~3공장의 부서로 배치되었고, 다른 부서로 옮기지는 못했다. 여러 공정을 다 배우면 조선인이 총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같은 일만 시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장 규모는 커졌지만, 헌병들이 곳곳에서 지키고 있어 직원들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고, 급식도 제대로 안되어 늘 배가 고팠다. 돈을 벌고 싶어 들어갔지만 착취만 당했고, 사직서도 받지 않았다. 3년 6개월을 버틴 뒤 도망쳤고, 우여곡절 끝에 해방을 맞았다. 75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했다.
그 많던 일제의 군수산업 시설 중 일부는 해방 이후 잠시나마 노동자들이 운영했다. 작가 이규원이 1948년 발표한 소설 《해방공장》이 바로 그 이야기를 전해준다. 조병창을 중심으로 하는 군수산업 시설에서 온갖 착취를 당하며 일제의 전쟁물자를 생산해내던 노동자들이 해방을 맞이하고 스스로 공장을 운영해나간 이야기를 생생하게 썼다.
후속편이 발견되지 않아 《해방공장》이 미완이 된 것처럼 조병창은 노동자들의 차지가 아니라 미군이 접수해 버렸다. 해방은 되었지만 완전한 해방은 아니었던 것이다.
미군은 조병창 일대에 눌러앉았다. 캠프 마켓, 캠프 하이예스, 캠프 그란트, 캠프 타일러, 캠프 아담스, 캠프 해리슨, 캠프 테일러 등 7개 부대를 주둔시켰다. 제24지원사령부도 배치했다. 영어로 애스컴이라고 불렀다.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도시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아예 '애스컴 시티'로 지칭하기도 했다. 그 애스컴이 1973년 공식 해체되어 많은 부지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는데 캠프 마켓은 아직도 남아 있다.
70년이 넘었지만 인천에서 미군이 저지른 일들은 아직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게 많다. 그중에서도 부평에서 벌어진 반공포로 탈출과 학살 사건이 주목할 만하다. 1953년 6월 18일 전국에서 반공 포로들이 석방된 날 부평의 반공 포로들만 석방되지 못했다. 포로들은 다음날 탈출을 감행했지만, 감시 병력이 한국군 헌병에서 미군 헌병으로 바뀐 뒤였다. 철조망을 넘다 미군의 기관총에 맞아 죽거나 다친 포로가 500명이 넘었다. 탈출에 성공한 포로는 1500여 명 수용자 중 300여 명이었다. 당시 반공 포로로 있던 박종은의 수기 《PW-포로수용소생활 1200일 실화》에 전하는 내용이다.
부평의 반공 포로들은 미군기지 건설작업에 동원되었는데,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지 못하고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당시 신문들은 탈출사건 이후 850명이 부평에서 논산으로 이송됐다고 보도했다. 사라진 350명에 대한 진상 규명 없이 묻혀버린 사건이라 마음이 착잡하다.
요즘 어린이들은 '성냥’을 《성냥팔이 소녀》 속 소품 혹은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이는 물건쯤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시절 성냥은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기 위해, 밤중에 화장실이라도 갈라 치면 등잔을 밝히기 위해 부엌과 안방 등 집안 곳곳에 성냥을 놓아두어야 했고, 휴대용으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집들이 선물로 성냥이 필수였고, 귀를 후비는 데도 그만 한 게 없었다. 홍보용으로도 제격이었다.
2019년 3월, 헌책방거리가 있는 인천 동구 배다리에 성냥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배다리 성냥마을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성냥을 발명하기 전에 불을 일으키던 도구인 부시와 부싯돌, 부시쌈지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성냥들을 전시해 놓았다. 제조공정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우리나라의 성냥공장들이 어느 지역에 퍼져 있었는지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도 있다. 2층에는 상표를 그리고, 접어서 성냥갑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공간이 있다. 옛 동인천우체국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작은 박물관이지만, 우리나라 성냥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귀한 공간이다. 배다리는 국내 최초의 기업 형태 성냥공장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한반도에 대규모 성냥공장이 들어선 것은 1917년 배다리에서 문을 연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처음이다. 인촌은 '도깨비불'이란 말이다. 부싯돌을 쓰던 시절 성냥으로 단번에 불을 붙이는 걸 보고서는 다들 깜짝 놀라 그렇게 불렀으리라. 자본금은 당시 돈으로 50만 원이었고, 신의주에 성냥의 필수 재료인 나무를 켜는 제재공장도 부속시설로 갖추었다. 성냥 생산능력이 연간 7만 상자였다고 《인천부사》에 나온다. 이 책을 펴낼 당시 경기가 불황이었다고 하는데, 조선인촌주식회사에는 남자 100명, 여자 300명의 직원이 일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성냥의 하루 생산량은 평균 2만6900타. 타는 일본식 단위로 12개 한 묶음이다.
성냥의 마찰면 발화재로 처음에는 황린을 썼는데, 독성이 있고 인화점이 낮아, 쉽게 불이 날 위험이 있기 때문에 1920년 안전한 적린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조선 성냥의 품질이 일본제품에 뒤지지 않게 되었고, 수입해서 쓰는 양도 줄었다. 국내 성냥 수요를 배다리의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 대부분 감당할 정도로 생산량이 많았다고 한다. 《인천부사》는 '작은성냥 상자를 만들어 공장에 보급하는 조선인 가정이 500여 호에 달하는 조선 유일의 성냥공장이자, 인천 공업의 자랑' 이라고 조선인촌주식회사를 소개하고 있다. 성냥갑을 붙이는 가내 수공업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성냥갑 붙이는 이야기는 현덕의 소설 <남생이>에도 등장한다. 1930년대 인천항 일대 풍경을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실감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주인공 노마의 아버지는 인천항에서 소금을 져 나르는 막노동을 하다가, 폐병을 얻어 구들장을 진 신세다. 부인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인데, 할 게 마땅치 않다 보니 인천항 선창가에 나가,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들병장수를 하게 된다. 술병을 들고 다니면서 잔술을 파는 일이다. 온갖 사람들로부터 희롱을 당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참다못한 노마 아버지는 집을 나서려던 부인의 술병을 빼앗아 내던지며, 굶어 죽더라도 그 일을 그만두라고 한다. 그리고는 시작한 일이 성냥갑 붙이는 일이었다.
그 옛날 가정집에서 부업으로 하던 성냥갑 붙이는 일을 이처럼 질감 넘치게 보여주는 소설이 또 있을까. 노마 아버지는 부인이 거들면 두 배는 더 하지 싶지만, 도와달라고 하기가 아니꼬워 엄한 노마만 볶아 일을 시킨다. 노마는 아버지의 시늉을 내 무릎 하나를 올려 턱을 괴고 앉아 작업을 한다. 그렇게 부자간에 붙인 성냥갑은 하루 천 갑 안팎이었다. 계산에 넣었던 양에 턱없이 떨어진다. 벌이가 될 리 없다. 그 시절 성냥갑 붙이는 일은, 기술 없는 무일푼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가능케 했던 마지막 수단이었다.
인천에 조선인촌주식회사가 들어서기 전에, 우리는 성냥을 수입해서 썼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청일전쟁 전후에 우리나라를 여행했던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수입 성냥을 장에서 팔던 모습을 그렸다. 비숍이 청일전쟁 직후 들른 황해도 봉산의 7일장에서 본 여러 수입품 중 일본제 황린 성냥도 있었다. 그 시기에 서울 양화진 쪽에서, 서양인과 일본인이 합작해 작은 성냥공장을 운영한 듯하다. 《인천부사》는 그 공장이 조선 최초의 성냥 제조업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1913년에는 대구에 소규모 성냥공장이 생겼는데, 이내 문을 닫았다고 소개한다. 조선인촌주식회사가 들어서기 1년 전인 1916년에는 성냥 수입액이 80만여 원이었다고 기록했다.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해방 이후, 인천에 새로운 성냥공장을 여러 개 세웠으며, 그 곳에서 다시 성냥을 만들었다. 1947년에는 성냥 제조업 허가제가 도입되었다. 《경기사전》에는 1950년대 후반 인천의 성냥공장이 10개나 되었다며 소재지와 대표자, 종업원 숫자까지 상세히 밝히고 있다. 고려성냥 합동공업사, 대한성냥 공업사, 한양 성냥공장, 목양 성냥공장, 인종 성냥공장, 동양성냥 공업사, 한국 성냥공장, 항도성냥 공업사, 인천 성냥공장, 평안 성냥공장 등이다. 인천이 우리나라 대표 성냥 제조도시였음을 실감나게 한다.
이랬던 성냥이 1970년대 후반 라이터가 등장하면서 설자리를 잃었다. 이제는 성냥을 밀어냈던 라이터마저 보기 드문 시대가 되었다. 배다리의 작은 성냥박물관이 구도심 동구에 활력을 불어넣는 불쏘시개가 되었으면 한다.
프로야구 시즌, 인천 SK행복드림구장 홈경기를 보러 가는 인천 팬이라면 누구나 따라 불러야 하는 노래가 있다. '연안부두’다. 8회 초가 끝난 뒤 1절만 부르고 스피커는 멈추게 되는데 응원석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2절까지 합창을 이어가면서 홈팀 사랑의 열기를 공유하고 드높인다.
‘어쩌다 한 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말 해다오 말 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작사가 조운파의 노랫말이다. 김트리오의 노래 가락을 따지지 않고 가사만 보더라도 선수들의 흥을 일깨우고 에너지를 충만하게 해야 할 응원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슬픈 곡조다. '어쩌다 한 번 오고' '꿈을 두고 떠나고’ '갈매기도 울고'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정든 사람은 떠나가고’ ‘불빛은 외롭고' '마음마저 홀로 서 있고….
게임이 종반에 접어든 그 절체절명의 시기, '승리'를 말하는 대목은 어느 한 구석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연안부두는 그렇게 만나는 희망보다는 떠나는 아픔과 그리움이 짙게 밴 곳이다. 노래 〈연안부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인천 팀의 응원가로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부산의 <부산갈매기>나 광주의 <남행열차>처럼 <연안부두>는 야구장에서만큼은 인천을 대표하는 노래로 굳어져 있다.
연안부두는 1970년대 신항으로 조성되었다. 1974년 5월 10일 인천항에 제2선거가 완공됨으로써 인천항 내항은 완전히 폐쇄형 항만이 되었다. 대형 선박들만이 도크를 통해 입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00톤 미만의 소형 선박들은 다른 곳에 정박 시설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제2신항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안부두가 건설되었다.
소월미도 남쪽 공유수면 7만6000제곱미터를 매립했다. 이를 위해 여러 정부기관이 참여했다. 우선 건설부가 남북방파제 650미터와 호안 590 미터, 잔교 5기, 임항도로 530미터를 축조했다. 인천시는 진입도로와 물양장 150미터 등을 건설했다. 수협에서도 물양장과 수산센터 1개동, 어물 하역 크레인 3기를 시설했다. 교통부에서는 여객터미널을 세웠다. 군용 선박도 연안부두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국방부에서도 잔교 시설을 했다. 이렇게 해서 연안부두에는 연안객선부두, 수산센터, 소형어항, 관용부두 등이 한데 모이게 되었다.
연안부두는 제2선거 준공 1년 전인 1973년 5월 1일 완공되었고, 연안여객터미널은 민자를 유치해 건설되었다. 연안부두 어시장은 소래포구 어시장과 함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수도권 최대 규모 수산시장으로 우뚝 섰다. 이 연안부두에는 인천의 어시장 역사가 녹아 있다. 내항이 있던 인천역 부근 하인천 어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생선장수들이, 연안부두로 어시장이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 왔다. 1981년 기준 연안부두 어시장 점포 수는 568개였다. 연안부두에는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규모 아파트도 건설되었다. 하인천에 비하면 연안부두는 그야말로 최신식 시설이다.
하인천 어시장이 성할 때에는 인천역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들도 많았다. 인천에서 커다란 고무 대야에 생선을 담은 뒤 냄새 나지 않게 비닐로 몇 겹이나 씌워 머리에 이고서는 서울 마포, 용산, 한남동 등지의 주택가를 돌아다니면서 팔았다.
좁디좁은 하인천 어시장에서는 사람이 붐비다 보니 소매치기도 많았고, 어린아이를 놓고 가는 아동 유기 사건도 잦았다. 자신의 어물전 앞에 버려진 아이를 어쩌지 못하고 데려다 친자식 삼아 키운 생선장수들도 있었다. 어물전에서는 이렇게 버려짐의 아픔과 새로운 만남의 희망이 버무려지기도 했다. 어시장이 연안부두로 옮기고 나서는 그런 일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어시장이 있으면 꼭 따라다녀야 하는 장사가 있다. 생선을 부패하지 않게 하는 얼음 장수들이다. 연안부두에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얼음 장사의 역사를 지닌 가게가 있다. 어시장 바로 옆에 있는 '천일얼음'. 가게를 처음 낸 것은 양계환 할아버지였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지금의 공장은 그의 아들이 운영한다. 양계환 할아버지는 1960년대 하인천 어시장이 있을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얼음을 팔았다. 큰 덩어리 얼음을 톱으로 잘라 팔던 시절이다. '천일얼음'은 연안부두 어시장이 문을 여는 첫날에 가게 문을 같이 열었다.
인천에는 언제부터 어시장이 생겼을까. 1933년 일본인들이 발행한 <인천부사>의 기록으로 그 시초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1887년에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아 경기도 남양에서 강화에 이르는 인천 앞바다에서 어로 행위를 시작했다. 일본 어선 15척은 1척당 은 10원 씩을 1년 수수료 겸 면허세로 냈다. 이렇게 잡은 물고기를 별도의 세금 없이 인천항에서 판매했다. 여기서 시작된 인천 어시장의 역사는 항구의 변천과 함께 연안부두까지 오게 되었다.
연안부두에는 팔미도를 오가는 유람선터미널에 해양광장이 큼직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러시아와 관련된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서막이 된 제물포 해전에서 일본군에 항복하지 않고 함대를 폭침시키면서 버텼던 바랴크호 승조원들을 비롯한 러시아 해군들을 추모하는 기념비와 러시아를 떠올릴 수 있는 상징 조형물들이다. 2011년에 인천시가 만든 상트페테르부르크광장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2019년 7월 개장한 인천광장이 있다. 러시아에 인천광장을 만들고 인천에 러시아광장을 건설하는 등 인천이 러시아와 대한민국 사이의 교류 상징도시로 떠올랐다. 이는 제물포해전 때 스스로 폭침시켜 수장한 바랴크호 깃발과의 인연에서 시작된 일이다. 2010년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바랴크호 깃발을 러시아 측에 장기 임대해 준 게 출발점이 되었다. 2013년 11월 저녁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인천 상트페테르부르크광장을 깜짝 방문하는 세계적인 이벤트를 연출하기도 했다. 러시아 주한대사관은 매년 2월 8일 인천 앞바다에서 바랴크호를 비롯한 제물포해전에서 숨진 러시아 해군들의 넋을 기리는 헌화 행사를 갖는다.
문학산 꼭대기는 왜 평평할까
제2경인고속도로 인천 시내 구간을 달리다 보면 문학산을 지나게 된다. 문학나들목이 바로 그 지점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과 포르투갈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가 열렸던 역사적 공간인 문학경기장도 문학산 자락에 있다.
인천 역사의 시작점도 이 문학산이다. 강화나 옹진, 부평, 계양, 서구 지역은 별도로 생각해야 할 문제지만, '인천의 역사가 2000년이 되었다'고 할 때는 그 연원을 미추홀에서 찾는다. 비류 백제 설화의 시작도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다. 16세기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인천도호부' 편을 보면 '고적' 항목에서 미추홀을 설명하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삼국사기>에 근거하고 있다.
주몽의 두 아들 중에 맏아들은 비류요 다음은 온조인데, 졸본부여로부터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행하니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드디어 한산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오직 이 한남의 땅이 북쪽으로 한수를 띠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비옥한 소택지대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천연의 험함과 땅의 이로움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비류가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고 온조는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위례성에 도읍하였다. 오랜 뒤에 비류가 미추홀은 땅이 비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정리되고 백성이 안돈되었다. 드
디어 부끄럽고 분하여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얘기하는 미추홀이 문학산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인천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썩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다. 신하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인천에 도읍을 세웠던 비류가 끝내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생이 있는 위례성에 귀부했다고 하니 말이다. 문학산 중턱에 아직도 일부 남아 있는 문학산성은 미추홀고성이나 남산고성으로 불리고, 정상에 있었다는 봉수대는 미추왕릉이라 부르기도 했다. 문학산 일원에서는 고인돌이 여러 기 발굴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문학산을 근거지로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비류의 무덤이 있다고도 전해지는 문학산을 가만히 바라보자면 여느 산 같지가 않다. 산의 정상은 대개 뾰족하기 마련인데 문학산은 꼭대기가 잘려나가 편편하다.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고 풀들도 자취를 감추는 겨울에는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꼭대기가 잘려나갔을까? 그에 대한 시조가 하나 전해진다. 인천 출신 시조시인이자 향토사학자인 소안 최성연이 문학산에 피어난 들국화를 보고 썼다는 〈들국화 2〉에 '하도 볶이다 못해 산마루도 깎였는데' 라는 구절이 나온다. 옛 모습을 차마 잊지 못해 철따라 들국화가 그 골짝에 피어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 하나를 증명해준다. 바로 1959년 시작된 문학산 미군부대 조성공사다. 문학산 꼭대기를 없애버리고 평평하게 만들어 미군부대를 앉혔다. '하도 볶이다 못해' 는 미군 내지 미국 당국의 조종을 받는 우리 정부의 위협적 압박이 인천시에 가해졌음을 고발하고 있다. <들국화 2>는 인천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문학산 미군부대는 1960년대 초반부터 운용되었다. 이 부대에 근무했던 한국군 병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평양을 타깃으로 하는 소형 전술핵을 탑재한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미사일의 사거리 200킬로미터는 인천과 평양의 직선거리와 맞먹는다. 문학산이 핵미사일 기지였다니 깜짝 놀랄 일이다. 미군이 떠나고 그 자리를 한국 공군부대가 넘겨받았는데 지금은 비어 있다. 2015년 인천시와 군 당국이 합의해 낮 시간에는 일반인도 산 정상을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했다.
문학산 정상에 올라서도 최성연이 말한 '이 고장 최고최대의 역사 유적' 은 찾을 길
이 없다. 미군은 부대 조성공사를 하면서 유물들을 따로 수습하지 않고 그냥 밀어버렸다.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이경성 선생이 남긴 자료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이 관장은 1949년 인천지역 곳곳에 있는 고적조사를 실시했다. 7회에 걸친 조사 중 첫 번째 지역이 문학산 방면이었다. 이 관장은 당시 봉수대, 문학산정 우물, 안관당 등 불과 10년 뒤에는 미군부대 조성 공사로 인하여 영영 사라져버릴 문학산 꼭대기의 유적들을 꼼꼼히 살피고 기록해 놓았다. 2012년 인천문화재단이 발간한 《인천고적조사보고서》(배성수 엮음)가 그 성과물이다.
이경성 관장의 고적조사 때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문학산 방면 첫날 조사는 오전 8시에 시작해 오후 7시에 끝났다. 학익국민학교(현 학익초등학교) 뒷산의 고려시대 사찰 학림사지 조사에서 일행은 '연우 4년 3월'이라고 적힌 기와 등을 발견했다. 1317년, 고려 충숙왕 시절의 유물이다. 학익국민학교 6학년 학생 두 명이 발굴작업을 구경하다가 문양이 있는 기와와 물고기 모양의 기와파편 등 다수의 유물을 발견했다. 이 관장은 그 두 명의 학생 이름까지 빼놓지 않고 보고서에 기록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우러져 유적지 발굴을 했다니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문학산 주변을 지날 때 산꼭대기가 평평해진 이유도 떠올리고, 문학산과 어우러진 여러가지 이야기들도 더듬어 살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돈대의 섬 강화는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도는 돈대의 섬이다. 강화대교를 건너든지, 초지대교를 이용하든지 강화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역사의 통로는 돈대다. 초지돈대나 용두돈대, 광성돈대 같은 곳은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돈대들이 100킬로미터
가량 되는 강화도 해안을 빙 둘러 54기나 있었다. 340년 전에 처음 만들어져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어 왔지만 지금까지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30기가 채 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강화에는 아직도 군부대가 주둔하는 조선시대 돈대가 있다는 것이다. 북한 땅이 마주보이는 강화 북쪽 민통선 내의 7기 정도가 그것이다. 조선의 군사들이 지키던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경계를 서고 있다니! 17세기 숙종 임금 때 쌓은 시설물을 우리 군이 방어 요새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다.
양사면 북성리 996번지 구등곶돈대에도 해병대원들이 주둔한다. 1679년(숙종 5년)
축조된 네모난 방형 돈대로, 둘레는 139미터쯤 된다. 허리를 숙여야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입구를 지나면 안내판이 나온다. 이곳을 진지로 쓰고 있는 해병대원 외에는 볼 사람이 없는데 한글과 영문 두 언어로 친절하게 써 놓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돈대란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관찰하고 대비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물을 말한다. 숙종 때 강화 전 해안을 하나의 방위체제하에 운영하고자 돈대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구등곶돈대는 지형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거북이가 기어오르는 듯한 매우 특이한 지형에 설치되어 있고, 전면과 좌우 측면으로 갯벌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어 외적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구등곶돈대 입구에서부터 해병대가 지키고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남쪽으로 하나밖에 없는 입구에 해병대원 이름표처럼 빨간 푯말로 '머리 조심'이라고 써 붙여 놓았다. 옛 기록을 보면 ‘구등돈은 둘레는 90보이고, 성가퀴는 46개이다. 북쪽으로는 작성돈과의 거리가 500보이다. 배를 댈 수 있다' 고 되어 있다. 여기서 옛날 길이 측정 단위인 90보는 요즘으로 치면 139 미터 정도 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강화도의 각 돈대를 연결시켜 방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돈대에는 포를 비롯한 각종 무기도 배치해 놓았다.
강화도는 고려시대부터 어떠한 외침에도 왕실의 안위를 지켜줄 보장지처로 인식되
었다. 1231년 몽골군이 침략하자 고려는 그 이듬해에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초원과 산악지대에서만 활동해온 몽골군은 바다 건너 상륙전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강화도는 38년간 전시수도로 기능했다. 강화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이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초토화되었다.
고려 왕실이 수도를 옮겨가자 개성에 살던 대다수 주민들도 강화도로 이사했다. 그때 이주한 인구가 10만 호 이상 수십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인구가 폭증했으니 식량난은 불 보듯 뻔했다. 농지 마련이 급선무였기에 대규모 간척사업이 시작되었다. 한반도 간척사업의 효시를 강화도로 꼽는 이유다.
고려시대 강화도 해안선은 지금보다 훨씬 굴곡이 심했다. 톱날처럼 들쭉날쭉해 배를 타고 침입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간척사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지면서 2개의 섬이 하나로 연결되기도 하고 해안선도 완만하게 바뀌었다. 그만큼 농경지는 늘어났다. 현재 강화도 면적의 30퍼센트 정도는 간척지가 차지한다는 분석도 있다. 고려 때 즉, 고릿적에 강화에서 시작된 갯벌 매립의 역사는 현대로 넘어와 인천의 신도시 개발로 이어졌다. 송도, 영종, 청라와 같은 신도시가 모두 갯벌을 메워 만들어졌다. 인천항 부지 주변도 대부분이 매립으로 형성되었으며 주안공단이나 남동공단 등지도 갯벌을 매립해 조성했다. 인천 곳곳에 매립지 아닌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몽골 침략 때 강화도로 피란해 고려 왕실과 집권층을 지켜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조선 역시 강화를 똑같이 여겼다. 하지만 생각만 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하기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인식으로 나라는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청나라 군사들이 날개를 달지 않는 이상 강화도를 넘볼 수 없다고 여기던 조선의 장수들은 이미 수군 운용술을 익힌 청나라 군대가 바다로 들이닥치자 걸음아 나 살려라 내빼기에 바빴다.
강화도가 무너지자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 임금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나라 홍30여 년 뒤 병자호란의 처참한 기억이 가시지 않았을 때 숙종은 강화도를 요새로 만들기 위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당했다.
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 중심에 강화 해안을 촘촘히 연결하는 돈대 축성 사업이 있었다.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기에 걸맞은 공간이다. 청동기시대 대표적 무덤 양식인 고인돌도 강화 부근리의 것이 가장 멋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여럿 있다. 마니산 단군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근현대까지 한반도 역사를 날줄로 꿰고 씨줄로 묶어 하나로 이을 수 있는 특이한 이력의 땅이다.
최근에는 서울에서 강화도로 커피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강화읍 신문리의 조양방직 공장 건물을 카페로 디자인하자 수도권의 커피 마니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흘러간 시간과 폐공장이라는 낯섦이 주는 독특함에 빠져들었다고 할까.
강화도에 웬 방직공장인가 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강화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대구보다 앞선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본고장이었다. 조양방직과 심도직물, 이화직물 등이 대표적인 강화의 섬유공장이다. 1959년에 나온 <경기사전>을 보면, 강화도에만 크고 작은 직물 공장이 70개가량 되었다. 이때 조양방직이 210명, 강화십자당직물이 144명, 심도직물이 130명의 종업원을 두고 있었다. 1960~70년대에는 규모가 커지면서 종업원도 크게 늘었다. 심도직물은 한창 때 1200명 넘게 일했다고 한다.
지금은 수건이나 행주를 만드는 영세 소창 공장 몇몇이 직물산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강화도에서는 공장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듣기 어려울 정도로 산업체 숫자가 줄었다. 강화군이 파악하고 있는 2019년 기준 강화도의 섬유제품 제조업체는 15곳이며, 종업원은 280여 명이다.
인천대교에 서서 자연과 도시의 공생을 생각하다.
송도국제도시와 영종도를 잇는 인천대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다. 총 길이가 21.4킬로미터, 바다 위에 뜬 부분만 18.4킬로미터다. 총 사업 기간 10년, 공사 기간만 따져도 2005년 7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4년이 넘는다. 사업비가 2조 4000억 원가량 투입된 엄청난 역사였다.
인천의 대표적 상징물 중 하나인 인천대교를 지나면서 우리는 그냥 바다만 보아서는 안 된다. 영종도 쪽 갯벌과 송도 쪽 갯벌의 차이를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바다 매립이 무엇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는 공간이 인천대교다.
오랜 세월 바다를 통해 드나든 역사도 생각해야 한다. 인천대교 아래 바다에는 물고기만 오고간 게 아니었다. 외세의 침략도, 개항시기 서구의 온갖 문물도 이 다리 아래 바다를 통해 들어왔으며, 우리나라의 수출입 물동량도 바로 이곳을 통해 드나들었다. 인천대교를 지나는 데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에 생각해야 할 게 무척 많다.
바닷물이 빠졌을 때 인천대교에서는 송도국제도시 쪽 해안과 영종도 쪽 해안,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썰물 때 영종에서 송도 방면으로 달리면 인천대교 요금소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갯벌이 드넓다. 물이 많이 빠졌다면 광활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넓어 갯벌 지대만 1분 30초 이상 달려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다. 인천대교의 상징과도 같은, 800미터 간격을 두고 우뚝 선 주탑 지점이 가장 깊은 곳이다. 높이 238미터가 넘는 주탑과 다리를 연결하는 굵은 케이블은 모두 208개다. 케이블로 다리 판을 비스듬히 매달았다고 하여 이를 사장교라고 한다.
주탑을 지나면 영종에서 본 바다의 모습이 다시 보여야겠지만 송도 쪽에는 갯벌이 없다. 그 갯벌은 송도국제도시가 깔고 앉아 있다. 송도국제도시 해안에서는 파도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는 해안으로 밀려드는 바닷물이 갯벌을 때리면서 내는 소리다. 송도에서는 갯벌이 사라지면서 바닷물이 일으키는 파도 소리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송도 개발 계획은 1979년 공유수면매립 기본계획이 수립되면서 시작되었다. 1984년 송도신도시 구상이 수도권정비기본계획에 포함되었다. 1986년에는 주거기능에 국제업무와 첨단산업단지를 동시에 조성하는 도시계획으로 바뀌었다. 송도지구의 계획상 면적은 53.4제곱킬로미터(1614만 평)이고 수용인구는 26만4000명이다.
1994년 9월 10일, 송도신도시 기공식이 열렸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행사에 참석했다.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그때 이야기를 자서전 첫 페이지에 실었다. 기공식을 며칠 남기지 않고 예정되어 있던 대통령의 참석에 문제가 생겼다.
“인천시 사업에 대통령이 굳이 갈 필요가 있겠느냐" 는 일부 중앙 부처 관계자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최기선 시장은 청와대 비서실로 전화를 걸었다.
“이건 인천이라는 한 도시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대사업입니다. 여의도 면적의 여섯 배가 되는 매립지에 최첨단 정보통신 도시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한국 최대의 공항과 항만을 거느린 세계 전진기지의 첫 삽을 뜨는 날인데, 대통령이 오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인천 송도 앞바다 매립 신도시 조성' 기공식에는 대통령이 참석했다. 비가내렸다. 당시 사진을 보면 YS는 경호원이 우산을 뒤에서 씌어주고 있는데, 최기선 시장은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뒤로도 대통령들은 송도에서의 큼지막한 행사에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송도국제도시는 인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매우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송도국제도시 개발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갯벌과 파도 소리를 함께 말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20만 명의 사람이 갯벌을 메워 살기 시작하면서 원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2천만의 게, 낙지, 조개, 소라들이 터전을 잃었다는 점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천대교에서 바라보는 송도, 스포트라이트가 강한 만큼 그 그늘도 짙은 법이다.
인천대교가 송도와 영종을 공간적으로 잇는다면 그 아래 흐르는 바닷길은 오랜 시간을 잇는 역사적 물길이다. 참으로 많은 나라의 전선들이 오고 갔다. 660년 삼국시대, 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대군이 신라군과 회합한 뒤 이 바다를 지나 백제로 향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도 이 바닷길을 지난 프랑스군과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 1875년 운요호 사건 당시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곳이 영종도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 역시 이 바다가 시작이었다.
당시 인천 앞바다는 군사적으로 긴박한 공간이었다. 세계 각국이 인천항에 군함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인천에 와 있던 영국계 저널리스트 앵거스 해밀튼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1901년 제물포 인천항에는 93척의 군함이 입항해 있었다. 그 중 35척이 일본, 21척이 영국이었다. 러시아는 15척, 프랑스는 11척, 오스트리아가 5척, 독일이 4척이었으며 이탈리아와 미국이 각각 1척씩의 군함을 인천에 보내 놓고 있었다. 이들 파견 군함의 숫자는 그들 나라가 품고 있던 한반도 침략 야욕의 크기와 비례한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국제정세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조선은 나라를 일본에 강탈당하고 말았다. 해방 후 빚어진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신호탄은 인천대교 바로 앞 팔미도 등대의 장악이었다.
인천대교에서 바닷바람 스치듯 살펴본 전쟁의 역사는, 그때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 텐데, 그때 이렇게 해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구나 하는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게 한다. 공간을 연결하고 거기에 더해 시간마저 이어주는 인천대교는 그 자체로 전혀 다른 차원의 전쟁기념관으로 삼을 만하다.
1920년대 후반에 노동 운동을 지도하던 유창호 유도 사범이 최승우, 김윤복을 비롯한 일부 유지의 찬조를 얻어 율목동 유도관 2층에 인천 최초의 주산 · 부기학원인 상업전수학교를 개설했다. 이는 늘어나는 기업체 사무직원의 수요를 채우기 위한 것으로 이후 이 학교는 동산 중학교로 승격하였고 후일 동산 고등학교로 성장하였다.
인천에서는 주산경기대회가 자주 열렸는데 이 또한 인천에 주산과 관련한 사무가 많았다는 증거이다. 1924년 2월 3일 개최된 '주산경기대회' 를 비롯해 많은 주산대회가 인천에서 열렸다. 대회 참가자들은 학생들도 있지만 은행원, 상점원 등도 있었다. 1924년 추산대회 1등은 조선은행 은행원이었다고 한다.
인천 최초의 학생 조직은 1911년경에 결성된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인 한용단을 그 기원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에서 서울로 기차 통행이 시작된 시기는 대략 1910년 무렵 부터이다. 이 무렵 인천의 인구는 3만 명이 넘었는데 보통학교 이상인 학교가 인천상업학교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여건과 경인 간의 기차 개통으로 불과 50분 거리의 서울로 진학이 용이했을 뿐 아니라 학생용 ‘파스' 라고 부르던 전기통학권의 가격도 1개월 1원 50전, 3개월 3원으로 매우 저렴했다.
거기에 높은 교육열이 기차 통학을 가능하게 했다. 다시 말해서 1883년 인천 개항과 함께 서구 문물의 도래와 더불어 각지에서 모여든 객주, 상인 등 수완이 좋고 학식과 견문이 넓은 사람 들만이 부를 쌓고 명성을 얻는 상황에서 인천으로 이주한 1세대들이 자신들의 부를 물려줄 2세들에 대한 교육을 위해서도 수도 서울의 신식 학교를 선택했다.
아무튼 3·1 만세 운동 이후 민족 해방 의식 고취와 더불어 한용단의 출발을 알리는 신문 기사가 나올 정도로 청년 운동에 큰 관심과 기대를 가졌었던 것이다.
일제는 1912년 인천항을 중심으로 수십 리의 해안을 탐사하여 조력발전의 가능성을 조사하였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강화도 동남부에 위치한 소구역에서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한 조력 발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강화도 부근이 발전 잠재력이 뛰어나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끝내 실행되지 못했다.
흔히 인천을 국내에서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곳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 우리나라에서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심한 곳은 삽교 일대이다.
러일전쟁 후 인천의 일본 거류지에서는 늘어나는 이주인의 증가로 가장 시급했던 것이 식수 문제였다. 이에 따라 일본 거류민단에서는 1905년 2월 도미타 민단장이 수도 부설 간담회를 열고, 자신들 거류지로부터 6km 떨어진 문학산 계곡에 빗물을 저장하는 수원지 조성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루 한 사람 사용량을 10갤런으로 하여 약 1만 4천 명을 충당할 수 있는 급수 능력의 수원지를 계획했으나 소규모라는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1905년 8월 일본인 공학박사 나까지마가 경인 수도 시설을 위해 실지 답사를 한 결과 한강 연안 노량진이나 뚝섬을 수원지로 해서 서울, 용산, 인천에 급수 할 수 있는 경인 수도 계획을 완성하였다.
1906년 6월 조선 정부가 수도 부설을 결정했으나 국고가 부족하여 관세 수입을 담보로 일본 흥업은행에서 1천만 원을 대출 받아 탁지부에 수도국을 신설하고 11월에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 공사가 준공된 것은 1910년 9월이었고 급수가 개시된 때는 1910년 12월 1일 이었다. 참고로 서울 영등포 지역의 급수는 1914년 12월 24일에 되었는데 인천보다 무려 4년여나 늦은 것이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곱뿌가 없으면 못 마셔요.” 한때 유명 코메디언이 하던 웃기는 이야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 인천에서 청량 음료는 1905년 2월 일본인 히라야마 마츠타로가 인천탄산수제조소를 열면서 출발했다. 그리고 1910년 5월 나카야마 우노키치가 라무네제조소를 설립하였는데 두 제조소는 모두 5마력 전동기를 사용하는 미국식 제조기를 사용했다. 판매지역이 전국으로 확장되어 사업이 상당히 번창했다. 1929년 생산고는 사이다 4,500상자, 라무네레몬에이드 3만 5,000다스에 이르렀다.
각 공장의 상표는 인천탄산수제조소가 별표 사이다와 라무네, 라무네제조소는 라이온과 헬스표 사이다였다.
이 사이다 공장은 광복 후 스타사이다라는 상표로 계속 영업을 하다가 문을 닫았는데 서울 칠성사이다에 흡수되었다.
조선운송주식회사에서 운송하던 품목 중에 별표·라이온·헬스 사이다가 눈에 띈다. 그리고 기독교부인교풍회 인천지부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던 것 중에 사이다가 포함돼 있었다.
오포는 정오포의 준말이다. 포를 쏘아 정오의 신호로 삼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겼는데 시보time signal라고도 한다.
인천이 개항장으로 많은 재화와 인물 군상들이 몰려 있던 시기에 표준 시간, 즉 기준이 되는 시간을 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표준 시간을 알리는 시계나 제도가 없어 심지어 재판 시간에도 많은 차질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매주 토요일 정오에 포를 발사해 줄 것을 인천항에 정박해 있던 자국의 청휘함 함장에게 건의하며 일본 해군성에 조회를 의뢰한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해에 오포 발사가 이루어진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렇게 처음으로 오포 발사가 거론된 후, 기록에는 1906년 2월 7일 2~3발을 시험 발사한 후 9일부터 정식으로 오포를 실시했다고 되어 있다. 일본시간 정오 12시에 맞추어 한국의 오전 11시에 포를 쏘았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 1871년 7월 12일 와카야마한에서 오포를 쏘았다고 한다. 『인천석금』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참고가 된다.
1905년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인천출장소가 설치됐는데, 이것이 인천 창고 영업의 효시이다. 이후 1912년 한성공동창고가 천일은행을 합병하고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해서 인천출장소가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는 일반 은행 업무는 종전대로 하면서 창고업도 겸했다.
1918년 10월 갑문과 독이 완성되어 내외출입선박이 증가함에 따라 창고 영업이 활황을 이루었다. 예컨대 1919년 자본금 5천만 원으로 창업한 인천창고주식회사는 개업한 지 2개월 만에 창업비용을 모두 상환했을 정도였다.
인천의 창고업은 나날이 '신기록을 깨는’ 상황이었을 정도로 활황을 이루었는데 『매일신보』 (1915. 4. 23)의 "近來의 新記錄을 破함 - 氣候가 春節에 入하며 暖氣가 益加하야 河海가 崩氷하고 舟船의 便利를 得함으로 僻地及沿岸各也로부터 穀物의 廻送이 容易하게 되얏슴....” 라는 기사를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인천부사』에는 1903년 3월 중구 해안동에 거주자의 요청으로 해안동에 살수를 했는데 이것이 인천시가지에 공공기관이 살수를 한 최초의 사례였다.
인천에는 그때에도 먼지가 많았던지 『동아일보』 (1924. 4. 24)에는 "인천에 살수차" 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인천부에서 금년부터 새로 사들인 물 뿌리는 자동차의 운전은 그 동안 준비 중이든 바 세관 옆에 물 끌어올리는 설비가 완전히 되었으므로 지난 22일부터 운전을 개시하였다”는 기사를 싣고 있어 인천이 공업도시로 발전하는 또 다른 증거라 하겠다.
『인천부사』에는 1903년 경성의 수의사가 1개월에 2번 출장을 와서 우유 검사를 했는데 이것이 인천에서의 공식 우유 검사의 시초였다고 하고 있다.
개항 이후 인천에는 외국인이 많이 거주했고 또 외국 선박의 출입이 잦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우유 생산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면을 추측케 하는 『매일신보』 (1913. 7. 18)의 기사를 인용해 본다.
“인천에서는 매년 1월부터 6월에 지至하기까지 반개 년 간 우유 착취량을 문한즉 착취소 4개소와 유우 정수 5백9 두요 착취량 94석 5두, 2승 9합인데 1합에 평균 7전이라더라.”
인천에는 1895년 8월경에 이미 비누 공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 규모 등 자세한 것은 불분명하다. 체제를 갖춘 비누회사는 1912년 10월 자본금 30만 원으로 송월동에 설립된 애경사가 최초이다. 주요 상표로는 화장비누에 美容愛敬 · 미쓰오 · 愛敬호산 · 미쓰미 · 金星 · 愛敬浴用 등이 있고, 세탁비누에 나비표 · 매표 등이 있다.
애경 비누의 판로는 조선 전국 각지였는데 가까운 경인지방이 60%를 차지하고 대전, 대구지방이 20%, 목포, 군산지방이 15%, 기타 각 지방 5%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원료는 야자유 · 우지(조선산) · 경화대두유(대련에서) · 경화유(어유) · 면실유 · 소나무수지(미국에서) · 가성소다 (영미에서) · 카스톨유(들깨기름)이었다고 한다.
인천에서의 전기 사업은 1905년 6월 각국 외국인 39인이 모여 공동 출자한 인천전기주식회사가 시초이다. 자본금 12만 5천원으로 설립된 이 회사는 1906년 인천이사청의 특허를 받아 중구 송월동 2가 한국전력 인천지점 창고 자리에 발전소를 차렸다. 직류발전기 2대, 100kW 규모의 화력발 전이었다.
개업 한 달만에 1천여 개, 2개월만에 1천8백여 개의 등이 설치될 정도로 인천전기주식회사는 한동안 호황을 누렸으나 자본력이 약해 1912년 7월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에 22만 5천원에 매각되고 만다. 이후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는 1915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바뀌고 1922년 7월에는 인천 발전을 폐기하고 거꾸로 서울 용산에서 인천으로 송전하는 체제로 바뀌고 말았다.
1931년 당시 전등 수요 호수는 8,943호, 전등설치 수는 3만 883호인데 이를 10촉으로 환산하면 6만 1,122등에 해당한다. 또한 동력 수요 호수는 158호, 전동기 설치는 199대로 모두 2,719마력을 공급했는데 주요 사용자는 정미업, 철공업, 인쇄업, 제분업, 제면업, 음료수 제조업 등이었다.
인력거는 1869년 일본 동경에 거주하는 와센 등 일본인 3명이 서양의 마차에서 힌트를 얻어 고안했다고 한다. 영업을 시작한 것은 1870년부터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1894년 하나야마라는 자가 10대의 인력거를 수입하면서 처음 선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천부사』에는 1895년 3월 12일에 인력거영업규칙을 발포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것은 현재 최초의 인력거영업규칙으로 기록된 1908년 마산이사청의 인력거영업취체규칙보다도 빠르며 같은 해 8월 15일자 서울 경무청령으로 공포되어 서울 및 경기도 일원에 적용되었다는 인력거영업단속규칙보다도 빠른 것이다.
당시 모든 개화 문물이 대부분 인천항을 거쳐 반입되던 시기여서 제일 먼저 인천 땅에 인력거가 등장했을 개연성과 그로 인해 인력거규칙이 제정되고 발포되었을 가능성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6·25전쟁은 이로 말미암아 생긴 후유증을 아직도 치유하고 있지 못할 정도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3년간의 격렬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반도는 초토화되었고,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와 전쟁피해자가 생겨났으며, 이 과정에서 생겨난 걷잡을 수 없는 대립과 증오로 인해 이후 분단체제는 더욱 공고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3년여의 처절한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 국토의 모든 곳이 전장과 다름없었지만, 전쟁의 운명을건 대 혈전이 벌어진 인천과 같은 전장에는 더욱 막대한 병력과 물자가 투입되어 전쟁사에 길이 남을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맥아더 사령부는 개전 초기 북한군의 공세를 오산 ~ 차령산맥 선에서 저지하고, 제1기병사단을 인천 등의 후보지에 상륙시켜 협공하여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블루하트 작전계획을 마련하였지만, 7월 22일경으로 예정된 작전은 미 제24사단이 북한군의 빠른 남하를 저지하지 못함에 따라 7월 10일경 취소되고 말았다.
8.15 광복 후 5년 간, 다시 말해 광복된 해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기까지는 광복의 열기에 들떠 있는 채 인천에서도 활발한 문학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활동을 시작 한 문인은 김차영, 배인철 등의 시인들이었다. 김차영은 광복 후 인천에서 최초로 『문예탑』이라는 문예지 성격의 동인지를 발간했는데, 비록 등사판으로 제작했지만 광복 후 우리 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바로 그날 창영동(현재 금창동)에서 문예 동호인회의 첫 모임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는 송준호 · 김자영 · 우봉준 · 신영순 · 한재홍 · 윤기홍 등이 참석했다. 이들이 주도한 '신문화협회' 라는 동호인회에서 『문예탑』을 펴낸 것이다. 그러나 인천에도 '문학가동맹' 이라는 좌익계 문학단체가 결성되면서 신문화협회 동인에 속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흡수해 간 바람에 신문화협회는 자연히 와해되었다고 김차영은 술회하였다.
인천의 택시 영업은 광복 직전까지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동(현재 중앙동) 2가 신홍자동차부의 경영주 지은영 씨가 운수부로부터 개인경영택시 영업면허를 받았는데 이것이 해방 후 인천 최초의 개인경영택시 영업면허이다. 이후 인천의 택시 경영은 인천자동차교통회사와 앞서 말한 신흥자동차부 뿐이었는데, 『대중일보』 (1947. 4. 25)에는 신흥자동차부에서 자본금 1,000만 원의 법인을 만든 후 고급차를 증차시키고 혼례용 자동차도 준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어 인천의 택시 영업이 성업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식점이나 주막 같은 영업집과 넉넉한 집안에서는 참나무나 소나무 장작을 땔감으로 사용했는데 장작 시장은 인천여자상업 고등학교 언덕 아래인 모랫말(사동) 해변에 있었다. 외지에서 배에 실어 운반해 오기 때문이었다.
솔가지 단나무는 소바리나 지게로 팔러 다녔다. 차츰 매갈이간과 정미소에서 나오는 섬에 담긴 겨를 온돌방 군불거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겨를 풀무질을 해 가면서 취사용으로 사용하는 알뜰한 집안도 생겨났다. 겨는 일찍이 인천이 개발한 값싸고 독특한 우리의 땔감으로 살림을 보탰다.
『개항 후 인천 풍경』이 아니더라도 1920년대를 거쳐 30년대에 이르는 무렵 인천은 미곡 집산지이자 수출항으로서, 정미업이 호황을 이룰 수밖에 없었는데 정미를 하면서 부산물로 나오는 막대한 양의 겨를 처치하기가 곤란해 인천 바다에 버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이 겨를 인천에서 땔감으로 본격 상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생긴 이야기였다.
1934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에는 “인천 7만 부민의 3분지 2 이상이 유일한 연료로 한다는 등겨값이 폭등을 하여 인천부민의 생활상 일대 위협을 주게 되었다. 는 바 등계 값은 작년 동기에 비해 배 이상의 등귀를 보였다 하며..."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동아일보』는 이 등겨의 값이 폭등한 원인이 만주로의 수출 때문이라고 썼다.
한때 "빈대를 확산시킨 곳이 인천이"라는 불명예스런 일화가 시중에 돌기도 했으나 지금은 웃음으로 넘길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20세기 초반 우리의 “주거 상황은 지금의 모든 건물이 흙과 단절되어 있는 것과 달리 흙과 연결되어 있었다. 골목길에서부터 앞, 뒤뜰 그리고 마루 밑과 부엌 바닥이 모두 흙이었다.
사람도 대지와 살을 맞대다시피 하고 지냈으니 날아다니는 파리와 기어 다니는 개미 같은 온갖 곤충과 공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곤충 중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기생충이 적지 않았다. 빈대는 이 · 벼룩· 모기 등 사람의 피를 빠는 기생충인 물 것의 하나였는데 피해가 가장 심했다.
인천은 빈대를 확산시킨 원천지라고 여러 지방의 원성을 들을 만큼 일찍이, 그리고 널리 퍼져 있었는데, 실은 청관이 근원이라는 말도 있었다. 빈대는 넓직한 지름 2mm 가량의 적갈색 곤충인데 낮에는 가옥이나 가구의 틈 사이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떼 지어 나와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다. 물리면 따갑고 가려워서 잠을 설치게 되는데 모기처럼 여름 한 철인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피를 양껏 빨아 팥알처럼 배가 부른 것 을 보면 그 피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청 · 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랴오뚱반도와 타이완 및 펑후열도를 할양받고 2억냥의 배상금을 얻는 동시에 한반도에서의 중국세력을 축출하는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러시아 · 독일 · 프랑스 삼국의 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뚱 반도를 청에게 다시 돌려줄 수밖에 없었고, 이를 주도한 러시아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아지자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결에 대비해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였다.
러시아는 삼국간섭의 대가로 청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조차하고 여순에 군항을 건설하는 등 만주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하였다. 1900년에 청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각국의 군대가 출병하였을 때, 러시아는 많은 병력을 파견하여 만주에 집중적으로 군사력을 배치시켜 이 지역을 장악하려 하였다.
1876년 일본과 체결한 「朝日修好條規」에서 양국은 부산을 포함해 3개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할 것과 조선의 해도를 일본이 작성하는 것 등을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877년 하나부사의 조선방문을 계기로 해도측량이 본격화 되면서 조선정부 내에서 인천 부평의 방비문제가 대두되었다. 그것은 인천과 부평이 강화 못지않은 보장중지이자 거리상 도성에 이르는 최단 거리의 경로라는 점, 일본이 인천 부평로를 파악하고 있는 점등을 의식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고종 15년(1878) 8월 27일 어영대장 신정희를 책임자로 하여 인천과 부평지역에 새로이 진을 설치하는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7월 1일 두 곳의 진사와 포대를 완성하고 그 명칭을 각각 화도진과 연희진으로 정하였다. 또한 각 군영의 훈련관 중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각 진의 별장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화도진과 연희진이 해문의 요충임을 감안하여 부근 1개면을 소속케하고 독진으로 삼았다.
1913년 5월 25일 자 매일신보의 기사는 아주 이색적인 내용을 보여 준다. 인천공립보통학교 (창영학교의 전신) 에서 학생들에게 양계와 관련한 지식을 습득하게 하기 위해서 닭을 기르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양계를 연습시킨것은 각 가정에서도 양계에 취미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가금류협회에서 지대한 관심을 가졌을 정도로 학교에서 닭 기르는 일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화젯거리였다. 양계 실습용 닭은 대체로 '고-징' 이나 '레구혼' 품종이었다고 하는데 보통학교에서 양계를 가르친 것으로는 이 또한 인천 최초의 사례로 전해진다.
1931년 여름부터 북성동 매립지에서 임겸상점에서 어시장용 얼음 제빙을 시작했다.
인천에서 제빙이 가능함에 따라 일반인들도 계절과 관계없이 얼음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예컨대 무더운 일긔에 따라 어름이 날개도처」라는 『매일신보』 기사가 그것인데 이때 인천에서 하루에 쓴 얼음이 20톤이었는데 이것이 신기록에 해당했다. 그리고 인천어획량 증가로 냉장용 얼음이 부족하다는 기사도 있다. 물론 1937년 7월 1일 인천 제빙공장 증설계획이 이미 있었다. 결국 얼음이 일반용이건 산업용이건 그 쓰임이 다양했던 것이다.
‘녀름에는 경성의 골목마다 빙수집이 업는 곳이 업을 정도로 빙수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신여성』의 글을 통해 보건대 인천에서의 제빙은 좀더 이른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인천 최초의 다방은 고급 학용품과 사무용구를 팔던 중구 경동 소재 문방구점 문운당의 주인인 박정화 씨가 차린 '파로마' 라는 다방이 최초라는 설이 있다.
『개항 후 인천 풍경』에 그 사실이 실려 있는데 "문운당 주인은 멋쟁이 신사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역시 멋쟁이답게 싸리재 네거리, 현재 상업은행(지금은 이 상업은행마저도 헐려지고 새 고층 빌딩이 들어서 있다.)이 있는 자리에 인천에서 처음으로 '파로마’ 라는 다방을 열어 인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다방이란 서울에도 문화인들이 시작한 '멕시코(종로)' '카 카듀(관훈동)' ‘낙랑(소공동)' 등 몇 군데 안 되는 시기라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대략 1930년대 무렵으로 추정된다.
인천에 있는 이발점에 대한 광고가 『만세보』 (1907. 3. 21)에 실려 있다. 인천 소재 이발점의 독자적 광고가 아니라 서울 이발점과의 공동 광고이다. 인천 조계에 위치하고 있던 종리이발점은 ‘맛사-지法구리무' 라는 ‘美顔術’뿐 아니라 ‘衛生婦人이 洗髮' 을 해주던 곳이었다. 물론 화장품은 '米國에셔 輸入한것' 이기에 '毛髮의 光라을 生’ 한다며 광고를 하는 것을 보건대 요즘의 풍경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발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했는데 ‘이발사시험제'를 통해야 했다. 이발업에 종사하고 있다 하더라도 시험을 거쳐 자격을 얻어야 했지만 특히 조선인은 시험에 응시하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제물포청년회에서 '아직 理髮試驗에 人格되지 못한 當업자들을 모아 강습하기로한(『동아일보』, 1924. 2. 19)’ 경우를 통해서 익히 짐작 할 수 있다.
인천 최초의 미용사는 누구일까. 어디에도 제대로 남은 기록은 없으나 『인천석금』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인천 최초의 미용 기술을 연마하여 미장원의 원조로 등장했던 미용사 심명숙 여사는 인천 갑부 심능덕 씨의 귀여운 따님이고, 현 평화공사 심의균 씨의 누님이다. 이분은 인천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소문난 미인이었다.
한증막이라는 일종의 대중 목욕 시설이 일찍이 경동과 금곡동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한국인 마을에 공동 목욕탕이 생긴 것은 1923년에 이르러서였다. 경동의 서탕과 화수동의 부영목욕탕이 그것이다. 『인천향토지』에 의하면 그 무렵 부에서 직영하는 부영목욕탕을 가진 도시는 평양부밖에 없었는데 인천에도 드디어 부영목욕탕이 생긴 것이다.
이후 부내에 있는 목욕탕의 수는 일본인측 12개, 조선인측 5개, 중국인측 1개로 합계 18개였는데, 부에서 운영하는 만큼 입욕료는 일반 목욕탕보다도 훨씬 싸게 2전을 기준으로 했다.
『매일신보』 (1923. 11. 11)에 “인천 외리 188번지에 신축중이던 목욕탕 서탕은 공사 드디어 준공되고 제반 설비도 다 마치었으므로 작 8일부터 개업하고 자축하기 위하여 개업 당일은 무료로 입욕케 하였는데...” 라는 기사가 있다.
이보다 앞선 1918년 8월 7일자 『매일신보』에도 “인천부 용리 209번지 목욕탕에서 불 때다가 굴뚝이 불완전하여 불똥이 지붕에 뛰어 대화가 될 것을 외리파출소에서 달려와...” 운운하는 목욕탕에 관련한 재미있는 기사가 보인다.
1949년에 이르러 화수동에 있던 기존의 공설목욕탕을 쇄신하고자 인천시보건후생협회에서 체신부에 1백만 원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이 목욕탕이 바로 부영목욕탕이다. 그래서 우물을 파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며 이에 따라 주민들의 기대가 대단했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여자 전화교환수가 등장한 것은 1920년 경성우편국에서 일어가 가능한 보통학교 졸업 조선여성을 채용하면서부터였다. 전화교환수의 응시요건은 목소리가 명랑하고 듣기 좋아야 했으며, 키는 약 4척 7촌 정도로 143cm 정도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채용시 시험을 보았는데, 시험과목은 국어, 산술, 작문과 적성 시험을 보아야 했다. 전화교환수의 대체적인 나이는 15세에서 18세 사이였는데, 가장 바쁜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2시까지의 시간이었으며, 이들의 임금은 5~6년 정도 일해야 30~40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근무시간은 9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였으며 3일마다 야근하고 다음날 쉴 수 있었다. 1928년 중앙전화국 광화문 분국에는 40명의 교환수가 있었으며 이 가운데 조선여성은 11명이었다.
한편, 인천우체국에서도 전화 교환수가 부족하여 인천에서 처음으로 시험을 통해 교환수를 채용했는데, 그 중에 영화학교를 졸업한 유성애 양이 있었다.
인천부가 1920년 8월 1일 율목동 58번지에 인천 최초의 노동자 공동숙박소를 설립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매일신보』 이날자에 “인천노동자공동숙박소 준공” 이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조선식 온돌 25칸, 바라크 2동 및 변소 1동으로 하루 5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숙박소 설치의 목적은 "노동자로서 주소가 없이 여인숙 또는 하숙 등의 숙박도 못하는 빈곤자에게 숙박의 편의를 도모” 하는 것이었다.
숙박료 5전, 식사 한 끼 15전이었으며 직업을 소개하기나 야학을 통해 노동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인천부사』의 기록에는 1921년 8월 5일 부설 직업소개소도 함께 개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공동 숙박소는 노동자 숙소로서 당시 인천부가 설립, 운영했던 일종의 사회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제국주의체제를 확립하고 대륙 침략을 위한 첫 단계로 정한론을 내세우며, 한반도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침략에 앞서 1874년 5월 대만침략을 단행하였는데, 이후 청나라는 일본이 장차 한국정벌을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경고한 자문을 조선정부에 보냈다. 또한, 조선정부 내에서도 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년 12월부터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열강과의 수교에 우호적인 의견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내외 여건을 파악한 일제는 포함 무력시위를 통해 조선과의 수교를 압박하기로 하고 1875년 5월초 운요오호 등 군함 2척을 부산에 파견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반도 해안에서 무력시위를 계속하였다. 동남해안에서 무력시위를 계속하던 운요오호는 9월 20일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에 정박하고 보트로 초지진에 접근하던 중 초지진 수비병의 포격을 받자, 초지진에 맹렬한 보복포격을 가하였다. 또한, 오후에는 강화 남단의 수로를 지키는 영종진에 포격을 가하고 육전대를 상륙시켜 공격하였다. 첨사 이민덕 휘하의 영종진 수비병은 화력의 열세를 극복치 못하고 패주하고 영종진이 함락되어 일본군은 진내에서 살육 · 방화 · 약탈을 자행한 뒤 철수하였다.
일본과 수교 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쟁탈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정부는 일본을 견제하고자 하는 청국의 조언을 받아들여 구미열강과 수교할 것을 결정하였다. 뒤이어 청국의 리홍장이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미국과의 수교를 알선함에 따라 수교논의가 진전되어 1882년 3월 25일 조약체결을 위해 슈펠트 제독이 인천에 도착하였다. 조선은 신헌을 전권대관으로 임명하고 김홍집을 부관, 서상우를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미국측과 협상 한 후 제물포에서 4월 6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전문 14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일본 및 청국과의 조약보다는 그 정도가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치외법권과 최혜국대우를 보장하는 불평등조약이었다. 주청 영국공사 웨이드Thomas Wade는 조미조약의 초안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리홍장에게 조·미조약 동일한 수준의 조약체결 후원을 의뢰하였다.
영국은 리홍장의 후원을 얻어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던 윌스를 인천 제물포로 파견하여 조선 정부에 수교의사를 전했다. 조선은 조영하를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김홍집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협상 후 1882년 4월 21일 제물포에서 조· 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독일도 조·미 수호통상조약 체결 소식에 자극받아 조선과의 수교를 서둘렀다.
1898년 여관영업단속규칙이 발포되었으나 그 내용과 일자는 불명하다. 다만 『개항 후 인천 풍경』에 당시 인천의 여관들이 매우 성업중이었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대불호텔이 양인과 일인 귀빈을 상대로 영업하고 있었으나 늘어나는 일인 여객을 위한 일본식 숙박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수진여관(관동), 화옥여관(중앙동), 천강여관(관동), 국옥여관(북성동) 등이 생겼다.”
“미두장 주변에는 고객, 중매점원, 건달 등 많은 한국인이 북적거리게 되었다. 이 사람들이 숙박업, 외식업, 유흥업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와 주택 수요까지도 늘려 놓았다. 주막과 보행객주밖에 없던 거리에 일본어인 여관이란 이름을 딴 본격적인 숙박업소가 등장했다. 용강여관(용동), 경인여관(용동), 개풍여관(내동), 연안여관(내동) 등이 있었고, 축현역 앞과 선창가에는 여인숙도 여러 곳 생겼다. 아마 여관이란 단어는 인천이 창안한 말이 아닌가 싶다.”
종교계 학교도 아니고 관립, 공립도 아닌 순수 민간인이 경영하는 최초의 학교는 제녕학교였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 기관이 영화학당이라면 인천 최초의 사립학교는 제녕학교인 셈이다.
1899년 서상빈은 인천에서 최초로 다소면 독정리에 유지들이 사립 일신학교를 세운 데 영향을 받고, 우리나라 사람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신학문과 영어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제녕학교를 설립, 후진 육성에 전념했다.
이 학교에 대해서는 『인천석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러일전쟁 후 인천의 유지 서상빈 씨가 이 학교를 설립했다. 서씨는 객주조합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신상회사의 사장이다. 그는 인천이 국제 무역항이자 서울의 관문인 산업 도시라는 것을 알고, 이 땅 인천의 일꾼에게 신학문과 영어를 가르치고자 하였으나, 학생을 가르칠 학교가 없는 것을 고민하였다. 그는 때마침 노일전쟁 당시 침몰한 러시아 군함 바리야크 호를 인양하여 큰 돈을 번 김정곤 씨의 협조를 얻어 내동 '강응원양조장' 자리 근처에 초가 30여 평의 건물을 건립한 것이다.
지금은 우리 생활에서 멀어져 간 고무신에 대해 대부분이 한말 법부대신을 지낸 이하영이 1919년 서울에 설립했다는 대륙고무를 최초의 생산처로 기록한다. 물론 이하영의 첫 제품은 순종 임금이 신었다는데 그것은 1922년의 일이다. 그밖에도 1921년 김성수의 중앙상공주식회사, 고중희의 반도고무공업소, 1922년 이후 김연수가 만들었다는 별표 고무신 등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형 고무신을 창조해 낸 원조는 분명히 인천일 것이다. 그리고 고무신이 탄생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견본 역할을 했던 것 역시 인천에서 발명된 경제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우리나라에 가죽 구두가 널리 보급되면서 인천 경동에 삼성태라는 양화점이 문을 연다. 그러나 당시의 구두는 한 켤레 값이 무려 쌀 두세 가마와 맞먹는 엄청난 고가품이었다. 여기서 삼성태의 주인 이성원이 착안한 것이 누구나 신을 수 있는 값싸고 질 좋은 짚신 대용 신발이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바닥은 가죽, 등 쪽은 우단이나 천막 천을 댄 오늘날의 남자 고무신 형태의 경제화였는데 한복 버선발에도 잘 어울리고 신고 벗는 데도 아주 편리한, 이름 그대로 매우 실용적인 신이었다.
인천 최초의 공설운동장은 웃터골이었다. 웃터골이란 인천 기상대 정남향 아래쪽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교정으로 쓰이고 있는 분지 일대를 일컫던 지명이었다. 동쪽으로 다소 치우쳐 터진 삼태기 모양의 이 골짜기는 1920년 10월 인천부가 정지 작업을 펼쳐 공설 운동장으로 개설한 인천 최초의 종합 경기장이었다.
이곳이 시민 운동장으로 변모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전해에 터진 3·1 만세운동 이후 일본이 철권 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방향을 선회하고 조선에 대해 신문 발행과 사회 단체 조직 등 일련의 유화 정책을 취한 데 따른 것이었다.
1934년 인천부립중학교 부지로 이 터를 내주고 도원동에 있는 공설 운동장으로 이전하기까지 대략 15년 동안 인천의 공설 운동장으로 역할을 해 왔다.
인천부립중학교는 인천중학교 전신으로 일본인 학교였다가 한인 학교로 바뀌었고 후에 다시 인천중학교는 고교 평준화 시책에 의해 폐교되고 지금은 제물포고등학교만 존재한다.
해장국과 추탕, 그리고 냉면이 과거 인천의 향토 음식이었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것이 다. 그러나 적어도 인천미두취인소가 문을 닫고, 한반도가 전시 경제 체제에 돌입하는 1930년대까지는 상품으로서 인천 고유의 음식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음식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910년대 인천항 축항 공사와 미두취인소는 많은 외지 인구를 인천으로 유인했다. 이렇게 유입된 각지 외지인들에게 제공된 음식이 바로 해장국과 냉면, 그리고 추탕이었다. 밥집들은 늘어나는 매식 인구에 비례해 점차 번창해 가면서 한국 초유의 대중 외식업으로 발전했고, 더불어 이 음식맛과 인천이라는 지명이 전국 각지로 함께 소문나면서 '인천 원조 외식'으로 인식 되었던 것이다. 인천 음식으로 특히 해장국이 유명했던 것은 재료가 흔해서였다. 개항 초기부터 인천에는 서양인과 일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까닭에 쇠고기 소비가 많았고 입출항 선박에도 상당한 수요가 있었다. 인천 해장국은 바로 여기서 부산물로 남겨지는 쇠 뼈를 재료로해서 탄생했다. 배추우거지와 함께 밤새 곤 뼈의 진액이 된장과 진하게 어우러지 구수하면서도 개운한 맛을 내던 것이 해장국이었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일본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담바구타령'에 등장하는 '동래, 울산' 에서 알 수 있듯이 담배는 남쪽에서 전해진 풀이라 해서 '남초'라 했고 요사스런 풀이라 해서 '요초' 라고도 불렀다.
인천의 담배공장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1899년 말경에 미국과 영국이 합작으로 설립한 '영미연초회사The British-American Tabaco Company' 가 담배를 생산했다는 설과 이 회사가 '중국 상해에 공장을 두고 인천항을 통해 히어로HERO라는 상표 를 가진 권련을 수입 · 판매하다가 1908년 3월에 인천의 중국조계 안에 분공장을 설치 · 생산했다' 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01년 그리스 사람 밴들러스가 인천에 와서 중구 사동에 동양연초회사를 설립했다가 수입 담배에 밀려 문을 닫았으나 지배인으로 있던 미국인 해밀턴이 인수하여 제물포연초회사Chemulpo Tobacco Co.를 개업하고 홍도패, 산호, 뽀삐 같은 담배를 생산했다는 기록도 있다. 1921년 연초전매법이 실시되어 전매국의 권련이 나오기까지 존속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제물포연초회사의 영문 글씨는 1980년대 중반 무렵까지 파라다이스 호텔 뒤편 언덕 아래 공장 같은 벽돌 창고 건물에 쓰여 있었다고 신태범은 생전에 증언하기도 했다.
3·1운동의 거족적인 전개에 힘입어 국·내외 각지에서는 독립 운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최고지도부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해 민족운동 세력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여 초기에는 각지에서 여러개의 임시정부가 선포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발표한 곳은 7군데 였는데, 이 가운데 조선민국임시정부 ·고려공화국과 간도임시정부와 신한민국정부는 그 주체가 불분명한 채 전단으로 발표된 '전단정부' 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령정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은 해당 지역의 민족운동가를 중심으로 수립된 것이어서 이후 통합논의를 거쳐 단일한 임시정부로 수렴되었다. 이 가운데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항 중의 하나가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회의라 할 수 있다. 한성임시정부는 3월 초 이교헌 · 윤이병 · 윤용주 · 최현구 · 이용규 · 김규 등이 이규갑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면서 그 수립이 구체화되기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각계의 대표들이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 공원에서 13도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정하였다.
햄은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훈연하거나 삶은 것이다. 햄이란 원래 돼지 넓적다리 살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부분의 살을 소금에 절여 훈연 등으로 가공한 것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인천 최초의 햄은 일본인 다카하시가 1915년 9월 송림동에서 제조한 것으로 인천햄이라는 상표로 발매하기 시작했다. 1년 후 노구치라는 일인이 새롭게 송림동에 공장을 세웠는데, 때마침 세계제1차대전 전후 세계 경제의 활황으로 일약 햄 제조업계도 놀랄만한 커다란 성장을 이루게 되었고 이에 따라 1922년에는 마쓰오라는 사람이 또 하나의 공장을 세우기도 하였다.
인천에서 만든 햄은 품질과 맛, 그리고 향이 일본 제품을 능가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1932년 연간 생산량이 7만 파운드, 약 31,752kg를 넘었다고 하는데, 단지 인천 특산품으로 머물지 않고 중국과 시베리아, 그리고 일본 각 도시로 수출되어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햄의 원료인 돼지는 생후 14~15개월 정도 경과한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하는데 시장에는 생후 7~8개월이 지난 돼지들이 주로 출하되어서 이들 업자들이 원료 구입에 아주 애를 먹었다고도 하며, 더군다나 소규모 공장에서는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1932년 무렵에는 겨우 마쓰오 공장만이 존속했다고 한다.
‘야당 도시 인천’ 지금은 그 빛깔조차 흐릿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을 일컫던 이 명칭은 개항 이후 계속돼 온 민초들의 저항 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특히 식민지 시대에 빈발했던 근로자들의 노동 쟁의는 저항 의식 배양의 중요한 모태가 되었다. 당시 발행된 신문과 전문가들은 일제하 인천 지역의 노동 쟁의를 ‘항구 도시와 공업 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연일 전개되는 항상적인 현상이었고, 자본가와의 대결뿐 아니라 일제와의 대결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 인천 지역의 근로자들이 끊임없이 노동 쟁의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탄압이라는 요인 이외에도 입지적인 면과 함께 당시 한국인의 경제적인 실태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인천은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지역보다도 일찍이 노동자 계층이 형성됐다. 여기에 수도 서울에 인접해 있다는 입지적인 요인으로 인해 일본 상인들의 진출이 많았고 이에 따른 경제적 과점과 수탈이 커서 시민들의 어려움과 불만이 컸다.
개항 이후 산발적이며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났던 인천 지역의 노동 운동은 1920년 노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가 설립되면서 처음으로 조직화의 중요성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 최초의 극장으로 인천 경동에 있던 협률사라는 설이 있다. 즉 어디서 근거한 것인지 1895년 개관설이 그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1902년 서울의 협률사보다도 무려 7년이나 빠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고증할 근거가 전혀없다.
『개항과 양관 역정』에는 “신세기 1900년에 들어섰을 무렵 이미 인천에는 상설 극장 2개소가 있었다고, 그 당시 내리 예배당 목사를 하고 있던 미국인 존스 철학박사는 소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 인천 경동의 협률사에 대해 개관 연도와 일자를 밝히지 않은 채 “그 당대 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가 운영하던 협률사라는 연극장이 있었다. 협률사는 오늘의 애관의 전신으로서, 일청전쟁중 (1894~95) 지었던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하였는데...” 라고만 하고 있다.
또 『인천석금』에도 “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는 예전에는 떠꺼머리 총각 엿장수였다. 그는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해 와 성공한 재산가이다. 일본말 하는 사람이 귀하던 시절에 이에 능통한 외지인으로서 일본인과 결탁한 실업가이다. 그는 용동에 창고 같은 벽돌 집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극장 '협률사' 이다. 당시에는 남사당패 또는 굿중패가 흥행계의 주역이었다. 인형극 박첨지, 흥부놀부, 땅재주와 줄타기, 무동타기, 승무도 있었고 성주풀이가 공연되기도 했다. 그래서 극단도 협률사라 한 것 같다.”는 기록만 남긴다.
좋든 싫든 인천이 국내 최대의 공업 도시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 1930년대 후반부터로 일제의 전쟁 수행정책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인천은 천연의 공업 원료나 재료, 그리고 노동력이 풍부하지 못해 전통적으로 공업 발달은 매우 느렸다. 19세기 말 강압에 의해 국제 사회에 문호를 연 이후에도 외세의 수탈물 가공을 위한 공업 시설이 간헐적으로 들어서기는 했지만 규모 면이나 수적인 면에서 지역 경제를 좌우하기에는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이와 같은 공업화의 부진은 일제의 식민 통치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1910년 한국을 병탐한 일제는 한반도를 철저하게 자국을 위한 원료 공급지이자 상품 판매지로 취급해 공업의 발달을 억제했다.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상공업 정책을 집약하여 1910년 12월 조선회사령을 공포한다. 이 법령의 주요 내용은 조선에서 회사 또는 지점을 설치하려면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한반도 내에 근대 공업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억 공업화, 숭 소비지화' 정책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미두취인소는 우리나라 최초로 인천에 개설되었다. 미두취인소는 일제가 한반도 내 미곡 시장 장악을 위해 제멋대로 설립한 수탈 기관이다. 인천에 진출한 일본 상인들은 한국산 미곡의 대 일본 수출이 격증하면서 인천항을 통한 미곡의 대외 거래와 정미업을 장악하게 되고 곧이어 한반도 내 쌀 유통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일본 상인들의 유통 시장 진출은 초기에는 큰 벽에 부딪혔다. 대일 수출 미곡의 조달을 한국인 객주에 의존해 온 데다 인천항 객주조합, 신상회사, 근업소 등의 힘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상인들은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일찍부터 미두취인소 설립에 대해 대단한 애착을 보여 왔다. 그러나 이 또한 일반 무역상과 일본을 제외한 외국인 상사들의 반대 여론으로 번번이 저지되고 말았다. 끈질긴 일본인 미곡상 14명은 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의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1일 마침내 미두취인소의 설립 허가를 획득하였는데, 그것도 우리 정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인천항에 있었던 일본영사관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120년의 연혁을 갖는 한국의 화교사회는 1883년 인천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4년 인천의 청국조계지 설정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화교는 산둥지방 출신 이 전체 화교의 90% 이상이어서 이들이 한국 화교사회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 첫 발을 디딘 중국 화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산둥지방 출신이 아니라 임오군란(1882) 당시 청나라 군인을 쫓아 온 중국 남방 출신 상인들이었다.
당시 청국 정부의 비호를 받은 광둥廣東과 저장浙江성 등 남방 南方출신 40여 명의 군역 상인(군대 또는 군인을 상대로 장사를하는 상인)이 청국 군인과 함께 인천에 도착한 것이 화교가 한국에 진출한 시초이다. 1883년 인천개항 당시 인천에는 총 59명의 화상이 있었는데, 그 중 9명은 청국 영사관에서 일했으며 33명은 정식허가를 받은 상인, 나머지 17명은 무허가 상인이었다. 이듬해인 1884년 화상은 모두 205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인천에 자리를 잡은 일본인과 상권을 다투기 위해 청국이 상인을 대규모로 보낸 것이다.
척후대라는 말은 초기 보이 스카우트를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1922년 서울 YMCA에서 조선소년척후대의 조직이 그 시작이다. 스카우트 운동의 목표는 좋은 품성과 건강한 체력, 그리고 유용한 기능을 갖추는 것으로 '사회 · 국가 ·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며 쓸모 있는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
한편, 1897년 내리교회는 한국 최초로 엡웟 청년회를 조직하여 교회 청년운동과 애국운동을 하다가 1906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당했다. 그러나 1908년 재조직 이후 1923년에 이르러 남·녀 엡웟 청년회를 통합하여 '소년회' 를 조직하였다.
이후 내리교회는 1925년 6월 1일 내리 조선소년척후대를 조직 했다. 이는 교회 내에 조직된 최초의 소년척후대로서 1929년 조직된 서울의 정동교회보다 4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1955년 창영초등학교에서 조직된 최초의 학교대가 생긴 것에 비해서도 30년이나 앞선 것이다.
1889년 가을, 일본인 고난이 중앙동에 인천활자소를 설립하여 활판 인쇄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인천은 물론 한국 최초의 활판 인쇄업 기록으로 남는다. 인천항이 개항장으로서 서구, 개화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 기능을 했던 만큼 인쇄의 필요성과 수입은 당연했을 것이다. 특히 인천은 주요 무역항으로서 상공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인쇄의 수요가 대두되었을 것이다.
인천활자소는 사업 번창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인쇄소의 주주는 9명 모두가 일본인이었다.
인천 한국인 거주지의 유일했던 활판인쇄소는 고급 학용품을 팔던 내동의 문방구점 이림상회가 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0년 후반 이종윤이라는 사람이 일본에서 익힌 인쇄 기술을 바탕으로 용동 마루터기에 선영사라는 전문 인쇄소를 차리게 된다. 앞에 말한 이림상회에서는 1932년 2월 15일 『강도지』를 인쇄하였다.
개항과 함께 인천항에 몰려온 외국 무역 상사들 가운데 가장 먼저 양관을 지은 나라는 독일계 세창양행이다. 세창양행은 1883년 상사 설립을 위해 함부르크에서 온 세 명의 사원을 위해 맥아더 장군 동상 일대에 숙사 건물을 지었다. 성탑처럼 생긴 4각형 2층 누각이 높이 서 있는 멋진 벽돌 건물이었는데 인천상륙작전 당시 소실되고 말았다. 이 황백색 양관은 존스턴 별장으로 불리던 인천각과 함께 인천항을 드나드는 외국 상선들의 랜드 마크로서 이름이 높았다.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이 건물은 서양인이 한국 땅에 지은 양관의 효시이다. 세창양행은 1884년 중앙동 3가 4번지에 단층 벽돌 양옥을 지어 개업했는데 이 건물 역시 사라지고 없다.
1883년 인천에 진출한 최초의 무역상이라는 영국계 이화양행은 지점 개업 이후 영업이 시원치 않자 이내 철수하고 말았는데 상사 건물로서 양관을 지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세창양행에 이어 진출한 외국 상사가 미국계 타운센드상회인데 중구 송학동과 내동 접경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타운센드상회는 한자로 타운선이라는 상호를 썼다.
“외국인묘지 하면 처음 듣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약간 의아해할 것이다. 아 시다시피 인천은 개항으로 시작하여 무역 항구로 성장한 도시이므로 외국인과 의 관계가 다른 고장보다 깊었다.
1883년~1914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인천에는 외국인의 특정 거류 지역인 조 계가 책정되어 일본인은 일본조계, 청국인은 청국조계, 서양인은 각국조계에서 생활을 하였다. 사람이 살고 있는 이상 갖출 것은 갖추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은 시내 복판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외곽 지대였던 야산에 조계별로 공동묘지를 설정했다. 그 중에서 각국지계의 묘지만은 외국인 묘지라 불렀고, 나머지는 일인묘지, 의장지, 청인묘지라고 했다.
근대식 우편 제도는 1884년 11월 18일 서울의 우정총국과 인천분국이 개설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인천분국이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 우체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천분국은 12월 9일 문을 닫는데, 12월 4일에 있었던 우정총국 청사 개업 축하연에서 김옥균 등 개혁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켜 3일 천하로 끝남에 따라 우정총국도 12월 9일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1895년 우체사가 설치될 때까지 10년 동안 다시 옛날 방식인 역참에 의한 통신 방법이 계속된다.
한편 일본은 1882년부터 인천 영사관 내에서 인천 주재 영사에게 우편에 관한 사무를 겸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1883년 인천이 개항되고 일본조계가 설치된 후, 일본인의 인천 이주가 본격화됨에 따라, 본국과의 통신을 위해 1884년 4월, 영사관 내에 우편국을 설치하고 운영에 들어간다.
중국 음식점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한국인에게는 자장면이라고 할 것이다. 정식 요리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 인천 태생의 중국 음식인 자장면은 이제 대한민국 남녀노소에게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중국 음식이 되었다.
자장면의 발생은 틀림없는 인천인데, 1883년 개항 이후 '인천 드림' 을 따라 산둥 지방에서 건너온 중국인 쿨리들과 부두노 동자들의 간편식 끼니였다는 것이다. 이 음식이 처음 공화춘에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증명할 수가 없다.
공화춘은 객잔이라고 부르는 여관 비슷한 영업도 함께 했기 때문에 쿨리들이 합숙을 했을 가능성과 그에 따라 집단 급식용 자장면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나, 이런 사실을 전하는 중국인 또는 한국인 증언자가 일찍이 하나도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공화춘 원조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물론 문서 기록은 더욱 없어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고 할 것이다. 아마 가난한 노동자들이 검소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1900년 12월 창간된 『신학월보』는 한국 최초의 신학 잡지이다. 감리교회에서 발행한 이 잡지는 우리말로 표기된 최초의 교회 잡지이기도 하다. 이 잡지는 한글 신학 잡지일 뿐 아니라 일반 기독교 잡지로서도 효시가 되는데 1900년~1910년 사이의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잡지의 편집은 존스Jones 목사가 맡았는데 그가 인천에 있었던 관계로 신학월보사도 인천에 두었다. 이 잡지의 발행목적과 의의는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을 통해 알 수 있다.
"월보는 선교지 전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어떤 욕구, 즉 기초 신학에 대한 욕구 때문에 발행되었다. 신학 문서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내용들이 한국말로 쓰여져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에겐 공인역본 신약성서조차 없다. ...... 우리 주변에는 뛰어나고 탐구적인 본토 전도인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그들에게 교과서가 있어야 한다. 그들을 훈련시키고 신학이나 교회사, 성경주석, 혹은 목회학과 같은 신학 주제들을 그들이 실지로 운용하고 살펴보도록 해주어야 한다.”
『신학월보』의 발행이 무엇보다 ‘한국인 전도인 양성’에 있었던 것이다. 1900년 직전부터 전도인 양성을 목적으로 하여 설치된 단기 신학 교육 과정이었던 신학회Theological Class의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이 잡지의 용도는 다양했다.
1922년 1월 6일 부립 도서관으로서는 국내 최초인 인천부립도서관이 개관한다. 이른바 세창양행 숙사가 제1차 세계대전 결과 독일의 패망으로 적산 가옥이 되어 경매에 붙여지자 인천부가 매입하여 도서관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했던 것이다. 최초의 장서는 불과 900권의 조촐한 도서관 (1930년 상시 5,351권이었고 등록자는 25,349 명)이었지만 국내 최초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열람자와 열람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조선매일신문 (1931. 12. 23) 기사에 따르면 '11월중의 열람자는 일본인 636, 조선인 1,220, 계 1,856명, 1일 평균 74명이지만, 전년 같은 시기에 비해 169명이 감소, 입관자는 역시 학생이 제일 많은 223명, 회사원 12명, 관공사 6명, 사업가 55명, 무직 기타 485명이다. 읽혀지는 서적은 부담 없는 전집류나 잡지 등이 수위를 차지하고, 문학, 국어류도 다소 읽고 있다'고 보도 하고 있다.
1901년 8월 14일 조선군이 월미도 정상에 포대를 구축하기 시작하여 9월 6일에 이르러 준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월미도 정상부에 길이 90자, 높이 6자 정도의 성곽을 쌓아 거기에 3, 4개의 반달형 포문을 설치하고 포차에 실린 야전포 2문을 배치했는데, 의정부 찬정외부대신 서리 외부협판 최영하가 인천감리 하상준에게 보낸 훈령에 보면 ‘‘귀항 월미도 포대를 건설하고 각국 군함과 예포하여 응답포로 한성 각 영사에 알려 훈령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인천항을 드나드는 각국 군함에 예포를 발사하여 입출항에 응한다는 취지였는데 1905년에 폐지된다.
우리나라 야구의 도입에서도 인천은 최초의 기록을 가진다. 일제 시대부터 구도로 불릴 만큼 야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컸던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한국야구사』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야구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hilip L Gilet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가 황성기독교청년단 회원들에게 타구 또는 격구라는 이름으로 야구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어 1906년 2월 11일 황성기독교청년단과 독일어학교팀이 야구경기를 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야구 경기라고 한다. 그러나 인천에서의 야구 시작과 관련한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인천에 야구 도입이 이보다 훨씬 앞선다는 증거가 있다.
...오전 구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듸 화륜거 구는 쇼릐는 우뢰 갓하야 텬지가 진동하고 긔관거에 굴독연긔는 반공에 쇼사 오르더라...
이 글은 『독립신문』 1899년 9월 19일자 ‘경인철도 개업식’ 기사의 일부다. 경인철도는 1897년 3월 기공되어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에 개통된 한국 최초의 철도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철도는 인천역(당시에는 제물포역)에서 노량진까지 33km에 걸쳐 건설됐는데 당시에 인천~서울까지 도보로 12시간, 인천~마포까지 수로로 8시간 소요되던 것을 1시간대로 단축시킬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경인철도의 기공과 완공에는 조선이 처한 경제적 질곡과 제국주의적 침략이라는 이중성이 교차되고 있었다. 열악한 재정 상태에 있던 조선 정부는 자체적으로 철도를 놓을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 경인철도 부설과 제반 권리를 획득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이미 1880년대 후반부터 군사 · 경제적으로 경부간 철도 건설을 계획하였다.
인천에 일본영사관이 개설되면서 1882년 부속 기관으로 최초의 경찰서가 설치된다. 이것이 인천에서의 근대 일본식 경찰 제도의 효시이다. 또 1910년 3월에는 경찰서 내에 수상계가 설치되고 1911년 4월부터는 중구 항동에 수상파출소가 운영된다.
인천항 경찰서에서 주변 환경을 청결하게 하려고 개를 때려잡았다는 기사도 있다. 즉 "청결기 위호야 그 쟝 빅성의 집에 기르는 개 이삼십여마리를 모다 다려 죽엿다더라" 가 그것이다. 혹은 광견병에 걸린 개가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있었기에 경찰이 나서 개를 잡는 일도 있었다. '인천경찰셔에서 종종 밋친개가 사울을 해하는 폐단이 잇는고로 그거슬 막기위호야...모든 개를 다. 따려죽인다더라' 그리고 경찰 서에서, '파리' 를 사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전염병을 예방하려는 차원에서 시행 된 것이다. '인천경찰셔에셔 파리사드린 수효는 넉되에 이의이치라더라'
인천에서 처음으로 일본식 간장·된장을 양조해서 판매한 사람은 1890년 이와에이이다. 이후 개인 제조를 넘어 대규모 제조가 이루어진 것은 1896년 11월 일본간장주식회사(간장주식회사의 전신) 설립부터이다. 특히 노다 간장주식회사 조선지점 공장이 생산하는 제품, 다카스기 장유 양조장 제품은 그 품질이 높고 맛 또한 일본 최고품보다 나았기에 일본에 448석, 중국과 만주 방면에 120석을 수출(1930년 기준)하였다.
간장의 원료인 콩, 소맥이 조선의 중요 생산품 이었는데 경기도, 황해도에서 우량품을 얻을 수 있었다. 중국산 소금 및 재제염, 천일염 등은 구하기 쉽고 가격 또한 저렴해서 인천이 간장 제조업으로 최적지였다. 예컨대 경성에서 제조한 간장이 5엔일 경우 인천에서 제조한 간장은 이보다 항상 20~30전 이상을 더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된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노다간장주식회사 인천공장이 생산하는 호마레 된장은 이 회사의 독특한 제조 방법으로 여름철에도 맛이 변하지 않고 잘 쪼개져서 일반에서 호평을 받았다.
대한천일은행은 최근 우리은행으로 합병된 한국상업은행의 전신으로 1899년 5월에 인천지점을 개설함으로써 국내 금융기관 최초의 지점 개설 은행이 되었다. 당시 대한천일은행은 일본 자본의 증가와 함께 일본은행 설립으로 금융 침투가 심각해지자 민족 자본 형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상인들이 고종의 윤허를 얻고 또 내탕금까지 지원받아 1899년 1월 30일 설립한 순수 민족은행이었다.
물론 이보다 앞서 갑오개혁 후, 몇몇 근대 은행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설립되는데 1896년에는 조선은행, 후에 한흥은행으로 개칭, 1897년 2월 한성은행, 조흥은행 전신 등의 설립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은행은 인천에 지점을 두지 않았다가 대한천일은행이 인천에 지점을 설치하자 뒤따라 지점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구미 각국의 외교 사절, 선교사, 여행객들이 입항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목적지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인천에 도착하면 서둘러 서울로 출발을 강행했다. 그러나 철도가 놓이기 전이어서 교통편이라고는 고작해야 조랑말이나 가마였고 아니면 본인 스스로가 도보로 나서는 것이 전부였다. 하루 종일 8시간을 걸어야 하는 도보는 만만한 것이 아닌 데다가 가마나 조랑말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배의 도착 시간 여하에 따라 인천에서 하루를 묵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당일 서울행이 어려운 여행객들을 위한 숙박 시설의 필요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특히 서양인을 상대로 하는 근대적 숙박 시설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호텔이 생기게 되는데 그 첫 호텔이 1888년 인천 중앙동에 세워진 대불호텔이다. 이 호텔은 1902년 서울 중구 정동의 손탁호텔보다도 몇 년 앞서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인천 최초로 세워진 폭약 창고는 세창양행 화약고였다. 1889년 12월 독배라고 불리던 연수구 옥련동 옹암에 세워진 이 창고 는 당시 동양 최대의 매장량을 가졌다는 운산 금광 등지에 채굴용 폭약을 공급하기 위해서 세웠다.
이어 1900년 미국계 타운센드 상회도 인천항 조계지 부근의 율도에 폭약 창고를 건설하면서 영국 노블 폭약회사의 폭약 중개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였는데, 세창양행을 능가하는 조선 내 최대 폭약 공급상으로 부상하였다.
타운센드의 창고는 대소 2개였는데 그 규모가 각각 163제곱미터 와 81제곱미터로서 모두 244제곱미터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옹암 소재 세창양행의 창고는 116제곱미터로서 타운센드가 조선내 최대 폭약기지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신문이 독립된 언론기관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넓은 식자층이 있어야 하고 기본적인 언론의 자유가 선행되어야 한다. 때문에 개항 이후에도 충분한 여건이 형성되기까지 한동안 인천지역에는 이렇다 할 지방언론기관이 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언론의 공백기에 인천 개항장의 일본인들은 신문을 방행하여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였고, 나아가 일제의 한국 침략 정책을 홍보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0년 1월 28일 『인천경성격주상보』라는 신문이 제물상보사에서 발행된다.
이것이 인천에서의 신문 사업의 효시이다. 이 신문은 해외에서 일본어판으로 발행된 첫 신문이며 인천 신문사에서 제일 앞선다. 이 신문은 『조선순보』 및 『조선신보』의 전신이기도 하다.
인천에서 최초로 청주를 양조했던 것은 1892년 9월 일본인 오카야마였다. 오카야마는 한국에 와있는 일본인들에게 일본에서 청주를 수입해 공급하다가 운임등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타산이 맞지 않자 인천의 풍부한 미곡을 이용해 인천에서 청주를 양조하기 시작했다. 이어 1897년에는 일본인 후카미 역시 인천에 양조장을 차려 자국인들에게 공급했는데 일본에서 생산한 청주와 비교해 술맛이나 질, 그리고 용기 등이 조잡해서 크게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차차 질이 개선되어 1908년 무렵에는 인천항에 청주 양조장이 7개 업체로 늘어날 정도로 번창했다.
해관은 수출입 화물에 대한 관세 사무 등을 맡아보는 행정 기관으로 오늘날의 세관과 같다. 해관은 1883년 6월 16일 우리나라 최초로 인천에 창설돼 업무를 개시한 후, 같은 해 10월 31일에 원산해관, 11월 3일에 부산해관이 각각 업무를 시작하였다. 인천해관은 현재의 항동 파라다이스(구 올림포스) 호텔 부지 동편에 설치됐는데, 창설 당시 인천해관의 초대 세무사는 영국인 스트리플링 A. B. Stripling이었다.
해관에서 부과하는 관세는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동시에 국가 재정 수입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외국과의 통상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치인데, 이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지 못했던 조선 정부는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인 1876년 8월 일본의 간교에 속아 향후 7년간(1883년 6월 22일까지) 수출입 물품에 대해 관세를 받지 않겠다는 서약을 맺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해관이 설치되는 1883년까지 조선은 무관세 체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인천에 3일장이니 5일장이니 하는 정기시장이 아닌, 근대적 상설시장을 개설한 인물은 정흥택이다. 그는 1895년경 동생 순택, 세택 등과 함께 중구 신포동에 최초로 생선전을 개설했다. 터진개 선창가였던 옛 신포슈퍼마켓자리에 한 옥으로 건물을 짓고 이른바 어물 객주를 차린 것이다. 그의 안목으로 이루어진 이 객주가 후일 신포시장의 명물로 이름을 날리던 유명한 생선전의 시조이다. 이후 해안이 매립되면서 선창이 멀어지자 생선 도매시장은 북성동으로 이전하나, 생선전만은 그 자리에서 여전히 활기를 띤다.
중구 전동 25번지에 자리잡은 인천기상대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기상 관측이 이루어지던 중앙기상대였다. 자유공원 북쪽 응봉산 봉우리, 제물포고등학교 교정 뒷 편의 울창하게 우거진 숲 속에 우뚝 솟은 백색의 원통형 건물이 마치 동화 속의 성곽처럼 고요하고 아름답다. 비록 일본인의 손에 의해 세워진 기상 관측소이기는 해도 1905년부터 1953년까지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의 기상 정보를 수신하여 그날그날의 기상을 분석, 예고 하던 기상 업무의 중추적 역할을 해 온 곳이다.
개항 후 인천은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정치, 군사, 외교, 경제, 교통 등 각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선박의 입, 출항이 빈번한 인천항으로서는 기상 관측에 대한 필요성이 매우 컸을 것이다. 1897년 프랑스 공사가 인천, 부산, 원산항에 허가를 요청했던 것을 보아도 그러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인천하면 지금도 성냥 공장과 직공 아가씨들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인천이 우리나라 성냥 공업의 시발지요 메카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성냥 공장은 손이 많이 가는 산업 이었기 때문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많았던 데서도 그런 연상을 하게 한 것이다.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 이란 보고서는 “1886년 제물포에 외국인들의 지휘 하에 성냥 공장이 세워졌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하게 됐는데, 그 주요 원인은 일본제 성냥이 범람했기 때 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록으로는 이 성냥 공장의 정확한 위치, 또 상호라든가 회사 규모 등을 알 수는 없지만 한국 최초의 성냥 공장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1885년 인천객주회가 결성되고 부산, 원산 등지에 객주회가 결성되면서 이들이 상행위를 독점하게 되자 정부는 도량형의 통일과 상거래상의 부정을 방지할 목적으로 객주 조합을 통합하여 균평사라는 단일 조직을 설립, 운영한다.
조선정부는 인천항에 균평사 본사를 두고 부산과 원산에 지사를 두어 각 항의 모든 상거래에 대하여 두형 등을 조사 통일케 하고 그 대가로 상인들로부터 일정액의 구문을 징수하여 균평사 운영 경비를 충당토록 하는 한편 정부에 상납도 하였으나 외국 상인들과 영사들의 집요한 항의로 이 제도 역시 폐지되고 말았다.
도량형이 인천과 경성에서 시범으로 실시됐다는 기록이 있지만 1911년 상반기까지도 여전히 도량형법이 정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89년 서울에 선교의 터를 구축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곧 인천 선교에 착수하여 청국조계 내에 초가집 2채를 구입하여 책방을 열었다. 그리고 이곳에 파송한 노병일로 하여금 책을 팔면서 전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국조계는 조선인 거류지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관계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아펜젤러는 본격적인 인천선교를 위하여 각국조계와 조선인거 류지의 경계지점인 내동 언덕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후 노병일은 2년 동안 인천에 거주하면서 열심히 전도를 하였으나 선교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노병일의 지나친 전도 열정과 인천감리의 선교 탄압이 주원 인이었다. 노병일은 밤에도 노방전도를 하여 주위 사람들이 밤잠을 잘 수 없을 정도 였다고 한다. 더욱이 행인에게 격분한 표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고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유교문화에 물들어 있던 인천 감리는 노병일의 광적인 전도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길 시에 는 퇴거를 명한다는 경고를 내렸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는 민중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여건이었다. 그러나 인천은 여전히 매력적인 선교지였다. 이런 판단에 따라 1891년 6월 내한한 굿셀 감독은 아펜젤러를 인천지역의 선교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아펜젤러는 매주 토요일 말을 타고 인천에 내려와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배재학당 강의를 하기 위하여 월요일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일제강점기 인천에는 향토관 (구, 세창양행 사택) 과 일본인 수집가들이 다수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었다. 해방 후 인천지역의 문화인사들은 일본인 소유 문화재의 반출을 저지하는 동시에 이를 수장 · 전시할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천시립박물관의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초대 인천시립박물 관장 이경성이었는데, 그는 우현 고유섭의 영향을 받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한 27세의 미학도였다. 이경성은 1945년 9월 미군정청 교화국장 최승만에게 자신의 포부를 밝힌 것을 계기로 인천 미군정의 훔펠 중위로부터 만국공원 향토관에 시립박물관을 설립하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 정식 발령을 받은 이경성은 만국공원의 구 향토관 건물을 보수하는 동시에 수장할 유물 확보에 착수하였다. 우선 구 향토관에 전시되어 있던 유물을 기본으로 하여 국립박물관에서 19점, 민속박물관에서 60점을 임대하였다. 아울러 박물관건립을 적극 지지한 훔펠중위의 후원으로 세관창고에 압류되어 있던 유물을 다수 확보하는 동시에 부평의 과거 일본 조병창에 있던 불상과 범종 등을 찾아 수장 하였다. 장석구와 같은 독지가가 유물을 기부하고 기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개관 직전에는 모두 364점의 유물을 수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개관준비가 완료된 1946년 4월 1일 인천시립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박물관으로 정식 개관하게 되었다.
축구가 본고장 영국인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직수입된 곳이 인천이라는 것은 널리 정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직수입되었다기 보다는 축구 시합이 최초로 열렸던 곳이라는게 타당하다. 1882년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 Flying Fish호가 제물포에 입항했을 때, 수병들이 잠시 상륙하여 자기들끼리 축구 시합을 벌였다는 것이다.
정식 시합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한국에서 벌어진 최초의 축구 시합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 영국 수병들은 축구가 끝나 배로 돌아가면서 공은 우리 어린이들에게 주고 갔다고 하는데 이 공이 또한 한국에 전해진 최초의 축구공이며, 이때 공을 찬 한국 어린이들이 최초의 서양 축구공을 찬 한국인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축구 전래설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문헌 기록이나 자료가 없어 실제로 확인하기 어렵다. 특히 이들 영국 수병들이 웃터골까지 올라와 시합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지나친 추측일 듯싶다. 이해 5월에 한영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개항이 된 것도 아닌 시점의 우리나라 정세와 분위기를 따져 볼때 해안에서 떨어진 웃터골에까지 올라와 외국군인들이 축구 시합을 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더불어 당시 웃터골은 다만 응봉산 골짜기 분지에 불과했고, 이곳이 정지되어 운동장 구실을 하기 시작한 때는 1921년 10월 1일부터이기 때문이다.
조계란 주로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하고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이다. 조선은 동양 3국 중 가장 개항이 늦은 나라였고, 조선 개항장에 조계를 설치한 각국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
조계를 설치, 운영한 경험이 있거나 자국 내에서 타국의 조계 운영을 경험한 나라들이었다.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설정한 조선내 ‘조계'는 그런 점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가장 '유리한’-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조선에 가장 '불리한’ - 유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인천이 일본에게 개항한 것은 1883년 1월 1일(고종 19년 11월 23일)이었고 1883년 9월 30일 ‘인천구일본조계약서’를 조인함으로써 약 7천여 평규모의 일본 전관거류지를 개설하였다.
서양인의 손에 의해 최초로 기록된 인천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언제 어떻게 해서 그런 기록이 남게 되었을까. 서해 5도는 어장으로서의 중요성도 크지만 옹진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요충지로서도 일찍부터 서구열강의 주목을 받아 왔다.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서세동점의 시기에 특히 서해 5도와 옹진 반도 일대를 중시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던 해군 장교 홀이 수많은 임무를 띠고 백령도에 상륙한 사실이 그러한 영국의 의중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홀은 『조선서해 탐사기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에 서해 5도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1892년에 출판된 『인천사정』에 따르면 인천항을 방문 하는자는 “빨간 기와의 큰 교회당이 시가지 뒤쪽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현재 인천시 중구 내동 3번 지에 위치한 대한성공회인천 내동교회를 가리킨다. 이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응봉산 남쪽 봉우리를 옛날에는 약대인산, 혹은 '약대이산' 으로 불렀는데 이는 성공회 부속 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성 누가 병원의 의사 랜디스E, B, Landis 박사를 칭송하여 부르던 한국 사람들의 호칭 '약대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약대인은 랜디스 박사의 의료 활동에 대해 우리 한국인들이 얼마나 신통하게 생각했는지, 탄복과 존경의 뜻으로 부르기 시작한 속칭이었다.
1890년 10월 10일 성공회에서 개원한 이 성 누가병원은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다. 그러나 당시 제물포 주민들은 이 병원을 성 누가 병원이라 부르지 않고 약대인 병원이라고 불렀다. 이 처럼 랜디스는 어떤 어려운 병도 신통하게 잘 고쳐 주는 명의로 서 당시 주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해항 검역에 관해서는 1880년 7월 8일부터 조선통상항 전염병침입예방규칙이 실시되고 있었다. 1886년 5월 콜레라가 창궐하여 예방검역소를 설치하고 처음으로 선박 검역 가규칙을 공포하였다. 인천 각 거류지가 공동으로 선박 검역규칙을 발포하고 1897년 7월부터 실행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해항 검역의 시초이다.
이후 1910년 만주 지방에 페스트가 발생하면서 해항 검역 수속을 발포하고 1911년 3월 17일 월미도 서해안에 인천검역소를 설치하였다.
1926년 10월 1일부터 인천항을 통해 나가는 소를 검역하기 시작했다. 이 이전까지는 부산항에서만 검역이 이루어졌다. 인천항에서의 검역 실시를 계기로 남포, 원산, 성진항에서도 검역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1902년 12월 22일,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하와이 이민 121명이 이민선 켄카이호로 인천항을 떠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이민의 첫 장을 연 순간이었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재배인협회의 비숍Charis R. Bishop 회장이 조선을 방문하여 정부와 이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당시 하와이는 노동 인력이 부족해서 임금이 상승하는 상황이었다. 주한 미국공사로 있던 알렌은 1902년 3월 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사탕수수 재배자협회와 한인 노동자의 이민 문제에 대해 협의를 하고 서울로 돌아와 자신을 신임하는 고종에게 이러한 사정을 보고하고, 적극적으로 이민을 권고했다.
하와이 노동 이민 정책이 결정되고 조선정부는 수민원을 설립하여 해외 이민과 기타 여행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고 그 책임자로 민영환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이민 희망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데쉴러 David W. Desshler에게 노동자 모집과 파송의 일을 위임하였다. 데쉴러는 당시 동양광산회사의 인천 주재 항만 사원으로 있었는데, 하와이 노동 이민 모집을 대행하게 된 데에는 미국 공사 알렌의 소개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전화가 처음 개통된 해는 1898년이다. 당시 궁내부는 궁중에서 각 아문과 연락을 위해 덕수궁에 전화를 가설하여 각 아문은 물론 인천에 있는 감리서와 통화를 하면서부터이다. 1898년 1월 28일 인천항 감리가 전화로 “오후 3시 영국 범선 3척이 입항할 것” 이라는 보고를 외아문에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전화를 다리풍, 덕률풍 또는 득률풍, 전어기, 어화통 등의 특이한 한문 이름으로 불렀는데 다리풍, 덕률풍, 득률풍은 영어 텔레폰telephone의 음역이다.
1902년 3월 20일에는 인천과 서울 사이에 최초로 일반 시외 전화가 가설되는데 이때 가입자가 총 5명이라고 전해진다. 같은 해 6월, 인천시내에 교환 전화가 가설되고 인천우편국에서 전화 교환 사무를 시작한다. 이어 1904년에는 인천정거장과 우편국 앞에 자동 전화를 설치하기도 한다. 1905년에는 전화 통화 사무를 인천우편국에서 시작했는데 , 당시의 전화기는 에릭슨사에서 제작한 자석식 단식교환기와 벽괘형 전화기였다.
이운사는 우리의 손으로 운영한 우리나라 근대적 해운회사의 효시이다. 개항과 함께 외국 선박의 빈번한 출입으로 해운업의 중요성을 깨달은 정부가 이운사를 설립한 것이었다.
개항 초 항만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항 이후 인천항에 출입하는 외국 선박이 날로 늘어나 정기 운항선이 개설되기에 이른다. 개항 당년인 1883년 초부터 정기 항로를 개척한 것이 청국의 상해 초상국이다. 초상국은 상해 · 나가사키 · 부산 · 인천 간의 항로를 개척하고 매월 1회 또는 2회 소속 기선 남승호를 취항시켰다.
여기에 자극받은 일본 해군의 어용선 숙예환과 오사카협동상회 소속 기선 진서환, 범선 제 2동복환이 이 해 4월 13일 입항하였다. 이 해 11월부터는 일본의 미쯔비시기선회사가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를 개설하고 고베 · 나가사키 · 쓰시마 · 부산 간의 항로를 인천까지 연장하여 엄동인 1월을 제외하고 매월 1회씩 정기 우편선을 운항하게 되었는데, 이 배는 우편물 이외에 여객도 취급하였다. 그러므로 관용 우편선으로 매월 2회씩 운항하던 군함편은 1회로 줄이게 되었다.
인천에서 상권을 확장하려던 일본 상인들이 1885년 10월 인천항 일본인상법회의소를 결성한다. 1892년 '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로 개편된 이 단체는 인천항 상공업의 현황, 회의소록사, 물가, 금융, 생산, 수출 등에 대한 통계와 해설이 게재되어 있는 『상업회의소월보』를 발간했다.
이처럼 일본 상인들이 월보를 통해 교류 정보를 확대해 나가자 조선인 상인들도 1905년 7월 '인천 조선인상업회의소'를 결성하고 1912년 5월 11일 월간지를 간행했다. 이것이 오늘날 인천 최초의 상업계 출판물로 평가받는 상계월보이다. 이 상계월보 창간호에는 간행을 의결한 임원회의 의사록과 경과 등이 아래처럼 기록되어 있다.
인천항은 우리나라 유일의 갑문항이다. 뻘 투성이 인천이 원시적이나마 항구로 기능하게 된 것은 1884년부터 1895년까지 지금의 항동 일대에 석축을 쌓아 만조 때 배가 출입할 수 있도록 선착장을 건설하고 나서부터이다. 물론 이 시설은 석축의 돌출부에 승강장을 만든 초보적인 시설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후 1893년 지금의 파라다이스 호텔(옛 올림포스) 남쪽 길을 메워 돌제, 길게 뻗은 석축를 축조하였고, 소월미도 끝과 팔미도 서쪽 끝에 등대를 설치하고 이를 알리는 나무표지를 설치하였다. 이 역시 극히 초보적인 시설에 불과하였지만, 해관 앞 부두를 출발한 기선이 인천과 마포 사이를 매일 운항하게 됨으로써, 그런대로 항만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1893년 초 조선의 군사 제도를 청국식으로 개편하면서 고종은 영국 해군과 같은 해군을 창설하려 했다. 고종은 조선 주재 영국공사에게 조선 정부의 근대 해군 창설, 해군사관학교 설립, 그리고 군함 1척의 판매 등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조선의 빈약한 재정 형편을 이유로 조선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청국식 해군 편제를 모방하기로 하고, 해군본부와 해군작전사령부 건물을 우선 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해군사관학교 교사 신축비 문제가 거론되자 청국의 이홍장과 사령관 정여창은 청국이 운영권을 갖고 있는 조선해관(세관)에서 그 비용을 지원토록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 돈으로 강화도 갑곶진 부근의 기존 수군 관아를 개보수하여 교사로 활용하고 일부 부지를 정비하여 교련장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해군사관학교, 조선수사해방학당이다.
해성보육원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센뿔수도회’ 에서 한국의 선교사로 파견된 3명의 수녀로부터 시작되었다. 1894년 여름부터 인근에 있던 사람들이 제물포 수녀원에서 부스럼 치료를 받았다. 어떤 경우는 수녀들이 가정집을 방문하여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그해 가을에 4살된 여자아이가 고아로 들어오고 12살의 여자아이를 데려오고, 다음해 4월 2살의 남자아이가 들어오자 천주교회 인천본당(현재 답동 성당)에 해성보육원을 설립했다.
보육원 설립 초창기에 수녀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대단했다. “우리 보육원 초창기에는 이곳이 센뿔수도회 수녀들의 훈련원 역할을 했답니다. 선교사로 파견되기 전에 한번씩 들렀다는데 외부의 도움없이 수녀들이 직접 일을 하고 식량이 부족해서 보리밥에 소금이 전부였답니다. 그래서 많은 수녀들이 폐병에 걸리거나 굶어죽기까지 했다”는 방 마리아 수녀(해성보육원 16대 원장)의 말을 통해서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우리나라 근대식 군함의 효시로는 1903년 인천항에 닻을 내린 ‘양무호’와 그 이듬해 서해안 경비를 위해 만들어진 ‘광제호’를 꼽는다.
국내에서 군함 도입을 계획한 것은 1902년. 당시 고종황제는 해군창설을 위해 일본에 군함 구입을 의뢰했고, 다음해 미쓰이물산 합명회사가 군함을 납품함으로써 4월 15일 인천항에 국내 첫 근대식 군함이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고종황제는 이 군함의 이름을 “나라의 힘을 키운다’는 뜻에서 양무호라 지었다. 하지만 양무호는 원래 영국상선이었던 것을 일본인이 조잡하게 만든 탓에 군함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양무호는 원래 1888년 영국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라스호라는 화물상선이었다. 배의 규모는 3천4백24톤, 1천7백마력으로 원양 항로에 취항했던 것을 미쓰이물산이 25만원에 구입해 일본 - 홍콩간 석탄운반선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배를 움직이는 데 하루 43톤의 석탄이 쓰이면서 골칫거리로 남자, 이 배에 고물대포를 걸어 놓고 우리 정부에 팔았던 것이다.
개항장에서 외국 상인과 직접 거래하는 상인은 객주라고 불리는 중개업자였다. 객주는 주로 물자의 집산지에서 도매상을 경영하면서 숙박과 창고 및 대금업 등을 겸했던 상인으로 조선후기 이래 상품 유통을 담당하던 주체였다. 개항장의 객주들은 그 지방에서 성장한 유력 상인이 점포를 차린 경우도 있고, 다른 지역에서 이주하여 개점한 경우도 있으며, 유력한 상인이 개항장의 객주를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천항의 경우는 외국의 거대 상사들이 상륙한 개항장인데다가 상품의 유입과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토착상인, 즉 객주들의 대외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배려하였다. 인천항의 객주들이 만든 최초의 조직적인 모임은 인천객주회로서, 1885년 조직된 이 회는 외국상인, 특히 자본과 수송에 있어서 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일본 상인들의 경제 침투에 맞서서 조직된 단체였다. 그렇지만 이 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객주들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자본을 갖지 못하였고 거의 반관반민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종래의 전통 상인 단체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지만 조직이나 기능에 있어 아직 근대적 상인단체의 체제를 갖추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인천항 신상협회는 1897년 1월 인천에서 설립된 한국 최초의 객주단체였다. 서상집 · 서상빈 · 박명규 등이 발기인이 되고 50여 명의 인천항 객주가 참여하여 결성된 이 단체는 장정을 갖춘 근대적인 상인단체로서, 인천 지역의 관료 및 명사들이 고루 참여하였다.
인천항이 개항이 결정되면서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된 것이 외국과의 통상 사무였는데, 이에 대응할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 바로 감리서였다.
감리서는 처음 일반적인 통상관계 업무만을 담당하는 관청이었지만 1896년 복설되었을 때는 보다 광범위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개항장에는 1896년 개항장에서의 모든 사법 업무를 맡는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에 감영이라든지 유수영 등 기타 지방 관아에서 행해지던 재판에 관한 모든 사무처리는 새로 개설되는 재판소로 이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천에 인천재판소가 개설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천항 재판소는 개항장이라는 특수성을 반영하여 설치되었다. 인천 개항장 내의 재판권은 개항장재판소, 즉 인천항 재판소에 귀속되어 있었지만 인천감리가 재판소의 판사를 겸하여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을 상징하는 가장 이름난 명소를 꼽으라면 월미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유공원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수문식 독이 있는 인천 내항 오른편에 울창한 숲으로 덮힌 작은 섬이 바로 월미도이다. 한때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는 안다.”는 말이 나돌 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관광지로서 또 근대 100여 년 한국 역사의 현장으로서 우뚝 솟은 이 섬은 말 그대로 인천의 상징이다. 월미도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 중의 하나는 바닷물을 데워 목욕 물로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조탕을 개발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월미도 산 중턱에 순환 도로를 뚫고 도로변에는 벚나무, 산에는 소나무를 심어 섬 전체를 가꾸어 1918년에는 풍치 지구로 지정하기도 했다. 1918년 인천 내항에 독을 건설하면서 한강으로부터 흘러드는 급한 물살을 막고 아울러 월미도까지 나룻배에 의존해야만 했던 교통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북성 지구(현 대한제분 앞)로부터 약 1km에 달하는 2차선 둑길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총 둘레 4km 정도의 이 작은 섬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둑길이 놓인 후 철도국이 소형 해수풀과 해수를 데운 이른바 공동 목욕탕식의 조탕을 만들고 이 곳을 임해 유원지로 개발한 후부터였다.
한국 최초의 상업 광고를 낸 상점이 인천 중앙동에 있던 세창양행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1886년 김윤식이 주동이 되어 폐간된 『한성순보』 에 이어 『한성주보』를 발간하는데 그 제4호 2월 22일자에 한문으로 된 세창양행의 광고기사가 처음 실린다. 이것이 언론 매체를 통한 상업 광고의 효시가 된다. 여기서 덕상이라는 말은 독일 상회라는 뜻으로 독일을 한자로 덕국이라 했기 때문에 ‘덕국상회' 정도를 줄여서 쓴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또 고백이라는 말은 당시 쓰이던 중국식 표현으로 광고라는 말에 해당한다. 광고라는 말은 후에 일본 신문의 영향을 받으면서 쓰이게 된다.
이화양행은 1832년 동인 도회사 소속 무역선의 선장이던 스코츠 윌리엄 자단과 제임스 매디슨이 광둥성 광저우에 설립하여 아편과 중국차(홍차)의 무역에 주력하던 영국 상사이다. 중국 등 아시아에서는 이화양행, 사전양행으로 알려졌다. 창립한 지 2년 후에 동 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 독점이 폐지되자 아편전쟁을 계기로 상하이·홍콩 등에 진출하였으며, 1859년에는 일본 요코하마에도 지점을 설치하였다.
1883년 6월에는 제물포에 진출하여 지사를 설립하고 화물운송, 우피무역, 광산개발 등에 주력 하였다. 그러나 영업부진으로 1884년 11월 영업을 중단하였다. 이화양행은 1883년 4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인,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상해를 거점으로 부산, 인천, 나가사키 사이의 항로를 개설하기로 하고 그해 8월부터 남승호를 월 2회 정기 운항하였다.
“인천은 한때 인심이 각박하다는 뜻도 담긴 짜다는 별명을 듣고 있던 만큼 소금으로 유명했다. 1910년 후반부터 60년대에 이르는 약 반 세기 동안 인천은 김장소금, 간장소금, 고운소금 등 모든 소금의 산지로 전국에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인천의 특산 명물 하면 언제나 소금이 첫머리를 장식하였으나 이제는 사정이 많이 변했다. 지금은 인천에서 한줌의 소금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천은 근대식 천일염 기술을 도입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염전을 축조한 곳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약 50년간 인천 관내의 염전이 우리나라의 연간 총 소금 소비량의 절반을 생산했을 뿐 아니라, 1920년을 전후해서 약 20년간 중국 산동성 천일염의 수입항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천일염을 정제한 새 하얀 고운소금을 만드는 재염공장이 인천에 집중 되어 거의 전국의 수요를 충당했다." 이상의 내용은 신태범의 『먹는재미 사는재미』에 나오는 인천 소금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천 소금을 유명하게 한 주안염전은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주안에 1정보 가량의 천일염전을 시험적으로 축조했다. 그해 9월 23일에는 조정에서 이완용 등 여러 관리들이 주안 염전을 시찰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주안염전은 3단계에 걸쳐 규모가 확장됐다. 제1기(1908~1911)에 26만4천평, 제2기(1917 ~ 1918)에 37만2천평을 증축함에 따라 염전이 모두 63만6천평에 이르렀다. 제3기(1921)에는 남동염전 90만평과 1925년 3월 군자염전 1백72만5천평을 만든다. 1932년 주안염전 총면적 3백26 만2천2백평이었다. 군자와 남동에서 생산된 것은 바닷길을 통해 인천으로 배로 실어나르고, 주안염전에서 만든 소금은 주안역전창고로 옮겨 주문량에 따라 판매했다.
조선 정부는 화폐 제도 정비 차원에서 1883년 7월 처음으로 상설 조폐 기관인 경성전환국을 설치했다. 이어 1885년에는 인천 소재 독일계 상사 세창양행의 설계로 전환국 신청사를 마련하고 세창양행의 중개로 도입한 기계를 설치한 후 1888년 3종의 신식 화폐(동전)를 주조한다.
1892년 경성전환국을 해체하고 중구 전동 옛 인천여자고등학교 자리로 이전한 것은 당시 동전 주조 기술을 맡은 일본인이 내세운 원자재 조달과 수송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당시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던 인천에 전환국을 설립함으로써 한국의 화폐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인천으로 이전한 전환국은 6개월여의 공사 끝에 1892년 11월 청사를 완공하고 시운전을 거쳐 이 해 12월 4일부터 주화 제조를 시작했다. 당시 인천전환국에서는 1891년에 제정된 신식화폐조례에 따라 본 위 화폐인 닷 냥 은화를 비롯해 한 냥 은화, 두 돈 오 푼 백동화, 오 푼 적동화, 한 푼 황동화 등 모두 5종의 동전을 주조했다. 이 중 닷 냥 은화는 1893년 이후 앞면 표기가 1환으로 바뀌어 발행됐다.
1905년 3월 송월동에 소규모의 유리공장이 인천 최초로 들어 섰다. 이후 1928년 4월 만석동에 인천유리제조소가 개업하여 약병 · 과자병 · 어항 등의 각종 소규모의 유리 제품을 제작하여 시내는 물론 충청도로 판매하고 중국으로 수출까지 했다.
유리의 원료는 규사 silica 인데 이는 황해도 연안에 풍부하게 분포돼 있었다.
한편 한국 최초의 판유리 공장도 인천에 설립됐다. 인천판유리 공장은 1957년 2월 14일 외화 365만 8,000달러, 우리돈 6억 2백만환이 투입되어 시공식을 갖고 20개월만인 1958년 9월 30일에 준공되었다. 판유리는 주형과 압연으로 일정한 형상을 만든 후, 표면을 연마해 만든 널판지 형상의 유리를 말한다.
인천항 최초의 정미소는 1889년 3월에 일본인 신도에 의해 인천 중앙동 4가에 설립한 인천정미소이다. 그러나 설비에 있어서는 타운센드상회의 스팀 동력 정미소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라 할 수 있다.
타운센드상회는 개항과 함께 인천항에 진출한 영국의 이화양행, 독일의 세창양행과 더불어 인천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 무역 상사였다. 타운센드상회가 인천에 진출한 것은 1884년인데 타운센드가 미국인 모오스의 무역상사 인천대리점을 운영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모오스·타운센드Morse and Townsend & Co. 라는 상호를 달고 영업을 했다. 그 후 1895년 타운센드가 모오스의 권리를 매수하여 독자적인 타운센드상회로 개칭하여 1930년까지 운영하였다.
타운센드는 상술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1885년 인천의 순신창상회를 인수한 뒤 서상집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미곡 무역에 종사하였다. 한국인 객주와 상인들에게 자금을 대여하기도 하였고, 무기를 구입하여 조선 정부에 납품하기도 하였다. 특히 왕실 관련 사치품과 전기 관련 용품 등을 납품하고, 왕궁 전등 시설 공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우피와 식료품, 식기류, 의약품, 의류, 침구류, 무기 및 화약류, 문방구류, 실내장식용품 같은 것을 인천 등지의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판매하였다.
1901년 일본은 개항 당시 우리 정부와 체결한 통상장정에 "조선 정부는 종래의 통상 이후 각항을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를 설치한다” 고 한 조항을 들어 등대 건설을 요구했다.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 등대와 백암 등표 건설에 착수해서 1903년 6월에 이를 각각 완공하였다.
팔미도 등대의 모습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우뚝허니 물결이 때려부서지는 바닷가 바위 위에 서서 밤 마다 그 큰 눈을 번쩍번쩍 굴리면서 밤길 가는 배들이 편안히 가도록 지켜주는 등대는 한번 찾아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여기는 서울서 얼마 되지 않는 인천 바다에 있는 팔미도라는 섬에 있는 등대입니다" 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인천을 대표하는 공원 중 하나인 자유공원은 1888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고의 서양식 공원이다. 응봉산 또는 응암산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동산 위에 자리잡은 이 공원은 처음 만들어질 당시 각국공원이라 불렸다. 이는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던 각국조계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4만 평이나 되는 넓은 면적의 각국조계에는 독일, 영국, 러시아, 미국 등 여러 나라의 서양인들이 살았는데, 그 위치는 일본인이나 청국인들이 모여 살던 일본조계와 청국조계를 제외한 응봉산 일대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일본조계가 7천 평, 청국조계가 5천 평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각국조계는 무척 컸던 셈으로, 이곳을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눠 구획 정리사업을 하면서 러시아 측량 기사 사바틴의 설계로 이 공원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 후 이들 조계가 일본의 압력으로 없어지게 되는데, 1913년 4월 각국조계에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청국조계가 없어진다. 그 뒤 일제는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자신들의 신사를 세워 그곳을 동공원, 만국공원은 서공원으로 바꾼다.
문 밖은 새로운 세계였다.
열 것인가, 빗장을 걸어 잠글 것인가.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작은 왕국 조선이 문 앞에 섰다.
위기일 수도, 기회일 수도 있는 선택의 순간.
조선은 문을 열었다.
개항.
특정한 항구를 열어 외국 선박의 출입을 허용하고 외국과 통상 관계를 공식화하는 일.
과연 조선의 개항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개항 이후의 급작스런 변화에 조선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 30여 년.
개항기의 조선을 들여다본다.
로마는 오랫동안 많은 이방인을 끌어당겼다. 독일의 괴테 역시 그런 이방인이었다. 그는 로마를 여행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로마에서 시작하는 역사는 세계 어느 곳의 역사와도 다르게 읽힌다. 다른 데서는 바깥에서 안으로 향하는데, 여기서는 안에서 바깥으로 향한다. 모든 것은 이곳에 모여 있다가 이곳으로부터 퍼져나간다. 로마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로마라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지만 괴테와 같은 이유로, 로마의 ‘바깥’인 유럽, 더 나아가 세계에 관한 이야기로도 향하게 될 것이다. 서양 문명의 두 뿌리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일컬어진다. 전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의) 고대 그리스 문명, 후자는 유대교와 그 분파들, 특히 그리스도교 문명을 말한다. 그런데 헬레니즘은 로마제국이 계승하고 완성해 널리 퍼뜨렸고, 지역 종교에 불과했던 그리스도교도 로마 교회를 거치며 세계 종교의 위상에 올랐다. 로마는 고대 로마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본산이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양 문명은 로마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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